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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 사계 - 정기복

모란공원, 사계 - 정기복 모멸이 얼음덩어리로 박힌 가슴팍으로나마 기어이 오면 이 언덕엔 어느덧 노랑제비꽃 피웠다 멸시와 비웃음 뒹굴고 비겁과 굴종이 길에 차이는 발걸음 이곳에 오면 두터운 먹장구름 아래 곧추선 물푸레나무 서슬 푸르다 구르는 비애와 날리는 체념 끝에 이곳에 오면 짧게 살아 푸른 잎, 끝끝내 살아낸 붉은 마음 어우러져 피었다 북풍한설 서리 내려 무덤을 덮고 죽은 듯 산 듯 허깨비처럼 걸어 얼음장 밑 흙살에 가 박힌다 한 줌 제비꽃 피워 올릴 뿌리 하나....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리영희 - 정기복 먹먹한 허공에서 눈이 내렸다 전조등에 비친 눈발은 불쑥 튀어 오르는 튀밥인 양 눈부시다 어둠이 천천히 물러나며 길과 길 아닌 것의 경계가 위태롭게 그려졌다 바람 몰아치며 눈..

한줄 詩 2020.12.23

최초의 교환 - 류성훈

최초의 교환 - 류성훈 깨진 저녁을 걷어차자 빗맞은 구름이 가슴에 걸린다 단단히 넣어 둘수록 단단히 잃어버리는데 가진 것 없이 잃을 준비만 하다 나를 두고 올 때 아무런 말도 못 섞을 삶이 하나씩 는다 인간이 행한 최초의 교환은 고독이었을 것 너는 내가 오답이기 위한 선물 아직 거기 있을 나는 몇 월 며칠의 밤이 될 것인가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월면 채굴기(採掘記) - 류성훈 몸 누일 곳으로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 흡연 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리 속 돌맹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줄 詩 2020.12.20

붉어지는 경계선 - 고광식

붉어지는 경계선 - 고광식 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건 기계음이다 친구의 죽음을 훔쳐보러 가는 길 악몽이 쏟아지는 검은 천을 길게 찢으며 간다 별들을 삼키는 터널과 심장 소리 들리는 강을 지나 지붕이 자꾸만 자라는 장례식장으로 간다 내 삶도 누군가 입력해 놓은 세밀한 지도 때문에 산과 강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설정된 길 위에서 자유로운 척 운전대를 잡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자유분방했던 친구의 생애와 붉어지는 가슴속에 딱따구리를 키울 부모를 떠올린다 어쩌면 친구의 삶도 입력된 순서대로 시작과 끝을 맺었는지 모른다 문득 새가 찢어 놓은 붉은 길이 나타나고 내 몸은 현재 모르는 공간 위에 있다 차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발신자의 징검다리를 건너 허공에 빗금을 긋는 강렬한 번개..

한줄 詩 2020.12.20

겨울 이력서 - 박병란

겨울 이력서 - 박병란 고졸이라고 썼다 밖에는 눈이 내렸다 소리 없는 것들이 중력을 습득하는 중이다 가라앉지 않아도 된다면 날개 없이 나는 방법이 있을 거야 서울로 왔다 수표동, 겨울의 청계천은 모두가 열심이었고 발을 놓아주지 않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버 에 내려 몇 걸음 못 가 울곤 했다 백 년 후를 상상하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 아이를 낳고 한 곳에 눌러앉았다 무엇을 지켜야 할 때가 되면 연습 없는 삶은 자꾸 가라앉았다, 두터워지는 중력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수 있다는 위로가 눈처럼 쌓인다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 이력서를 쓴다 여자도 아내도 졸업했는데 고졸이라고 쓴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북인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 박병란 그렇게 을지로 ..

한줄 詩 2020.12.20

섬 - 조우연

섬 - 조우연 이 거대한 묘목을 심는 시기와 심는 장소가 따로 없으나 강이나 산 주변같이 전망 좋은 곳에 심을수록 더 잘 자란다. 심고 나면 e-편한세상, 푸르지오, 더 #, 캐슬, 휴먼시아 식으로 명명한다. 사람들은 나무 옆구리에 굴을 파고 기어 들어가 물관과 체관을 점령하고 맹렬히 기생한다. 학명 Insula arbor*인 이 나무가 기원전 3-4세기부터 심어졌다고 하니 고대 로마 시절부터 사람들은 섬이라는 우울한 영역을 살아온 셈이다. 어떤 이가 또 오래된 작은 섬에서 추락했다. 그것으로 그는 격벽의 틀을 깨고 나무를 떠났다. 비를 받고 태양이 비춰도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않지만 더 우람한 나무를 갖고 싶은 사람들로 이 벌레 먹은 수목의 군락은 날로 늘고 있다. *Insula arbor: Insul..

한줄 詩 2020.12.19

겨울비 - 백무산

겨울비 - 백무산 겨울비 천장에서 떨어진다 거실 바닥 흥건하다 보일러 배관은 얼어 부풀었다 그래도 바닥이 편하다 모든 바닥은 따듯하다 노동이 빠져나간 몸은 퇴적암이다 어쩌라는 거냐 문자메시지는 아침부터 부고다 세면실 거울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지디피 삼백불 밤 완행열차를 타고 볼 터진 운동화 한켤레로 열여덟에 떠난 공단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닌 늙은 아버지가 있다 양치질할 때면 한번씩 가슴에 이는 불덩이는 쌓인 쇳가루와 시너 가스와 최루탄 연기 뒤집어지나 빈손과 상처투성이 그리고 툰드라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고맙고 부끄럽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 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 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 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 이렇게 ..

한줄 詩 2020.12.19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 - 허유정

난데없는 전염병으로 한해가 온통 엉망이 되었다. 처음엔 이 난리통을 몇 달 참으면 되겠지 했는데 진정이 되기는커녕 갈수록 태산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는지 감염자 숫자에 많이 둔감해진 편이다. 올초 마스크 대란 때는 살다살다 이런 일도 겪으며 사는구나 했다. 천정부지로 뛴 가격은 시장 원리 상 그렇다쳐도 사려해도 살 수 없는 것이 분통이 터졌다. 아무 날이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정된 날짜에 신분증이 있어야 마스크를 살 수 있는 기막힌 시절을 보냈다. 그래도 한해가 간다. 며칠 전 연말을 일찌감치 조용히 집에서 보내기로 작정하고 여러 책을 주문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책이다. 라는 책 제목이 너무 착하다. 제목만 착한 게 아니라 내용도 착하기가 완전 무공해다. 세상에 나온 이상 목숨을 ..

네줄 冊 2020.12.18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의 기차 - 박인식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의 기차 - 박인식 타고 길 떠날 때보다 철길 건널목에서 지켜볼 때가 더 좋다 냇물에 징검돌가듯 가는 기차에 서 있는 내가 간다 길을 옛길 맨 처음 기차와 만난 수십 년 앞 시간의 길 기차는 지나가고 건널목 맞은편 영화관이 문을 연다 기차가 얼마나 멀고 긴 시간 길을 되돌렸는지 극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일곱 살 사라진 기차는 먼 기적소리로 그 인생극장 영화 주인공이 '나'라고 그 '나'는 예순 해 앞 소년이 아니라 막 건널목을 건너온 오늘의 소년이라 말해준다 기차에 먼 산 가듯 가는 기차에 먼 시간 구르듯 구르는 *시집/ 겨울모기/ 여름언덕 그때 - 박인식 산을 오르던 그때 하늘서 내려온 능선과 바다에서 올라온 골짜기가 산정에서 만나 내외하며 살던 그때 인생 고개 넘고 넘어 산을 내..

한줄 詩 2020.12.17

선을 긋는다 - 황형철

선을 긋는다 - 황형철 별 하나가 몇억 광년을 살며 우주를 횡단한다 눈 깜빡하는 순간 지구를 스치고 마는 것이지만 중심을 벗어났을 때만이 가장 아름다운 선을 긋는다 너와의 시간이 천체의 일부였다면 홀연히 사라진 말들 또한 많고 많았으니 지금도 무한한 우주 어딘가 행성처럼 떠돌고 있을 못다 한 말들이여 네 마음에 별똥별 같은 선 하나 긋기는 했는가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종(種)의 기원 - 황형철 혹을 지고 평생을 떠돌아야 하는 유목의 시간은 얼마나 무거운가 모래언덕을 넘는 일이란 소멸의 기점에 가까워지는 것이라 여긴 적 있다 실은 멈춰 있는 것이야말로 진짜 죽음 생사존망은 신의 것으로 두고 더 깊게 들어가야 하는 운명이 있다 지나온 발자국이나 세상의 환란 같은 거 쉽게 모래에 덮이고야 말 것..

한줄 詩 2020.12.17

청어 - 윤의섭

청어 - 윤의섭 버스를 기다렸으나 겨울이 왔다 눈송이 헤집어 놓은 생선살 같은 눈송이 아까부터 앉아 있던 연인은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저들은 계속 만나거나 곧 헤어질 것이다 몇몇은 버스를 포기한 채 눈 속으로 들어갔지만 밖으로 나온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노선표의 끝은 결국 출발지였다 저 지점이 가을인지 봄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눈구름 너머는 여전히 푸른 하늘이 펼쳐졌을 테고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시간은 좀 더 빨리 흘러갈 것이다 끝내는 정류소라는 해안에 버스가 정박하리라는 맹목뿐이다 눈의 장막을 뚫고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건 기다리지 않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일 등 푸른 눈구름이 지나가는 중이다 국적없는 눈송이들의 연착륙이 이어졌고 가로수의 가지들만이 하얀 속살 사이에 곤두서 있다 버스를 기..

한줄 詩 2020.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