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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 - 김유석

알리바이 - 김유석 둥근 벽시계 하나뿐인 방 들보에 목을 맨 사내가 축 늘어져 있다. 발바닥과 방바닥 사이, 천 길 허공을 어떻게 디뎠을까 자살과 타살이 함께 저질러진 듯한, 멎은 시계와 머리카락처럼 흩어진 방바닥의 얼룩은 사내를 살려낼 수 있는 모종의 단서...., 현재의 시간을 맞추자 바늘이 거꾸로 돌면서 얼룩 위에 물방울이 돋고 썩어 가던 냄새가 사내의 몸속으로 빨려든다. 아주 천천히 사내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릴 때까지 딱딱하게 굳어 쌓이는 물의 계단들. 사내의 몸이 모빌처럼 흔들리고 발바닥이 닿자 차갑고 두터운 틀로 변하는 물은 단말마의 전율을 통증으로 바꾸며 어떻게든 살아오게 했던 기억들을 뒤진다. 머리를 묶은 풍선과 가슴속 시든 꽃들, 손가락 새로 빠지는 모래알들. 목을 매야만 했던 까닭을 떠올..

한줄 詩 2020.12.07

오늘 하루만이라도 - 황동규 시집

시집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서점으로 달려가 손에 넣은 시집이다. 내가 사랑하는 신촌의 홍익문고다. 최근 외관을 단장했지만 여전히 승강기가 없어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해서 더 좋은 아날로그 서점이다. 지난 11월 내내 이 시집과 함께 했다. 읽다가 창밖을 보며 첫눈이라도 내렸으면 하게 만드는 시집이다. 황동규 시인은 1938년 출생이니 팔순을 훌쩍 넘겼다. 선생은 참 많은 시집을 낸 원로 시인이지만 그의 시집을 며칠 동안에 걸쳐 온통 몰입해서 읽은 것은 오랜 만이다. 돌아 보면 황동규 시인과는 오랜 인연이 있다. 뭣도 모르고 간 군대에서 황동규 시인을 알았다. 몇 달 앞서 입대한 선임이 시집을 여럿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없이 놀기만 한 청춘이었기에 시를 맛도 모르고 먹는 음식처럼 읽었다. 그중 오..

네줄 冊 2020.12.07

안부를 묻는다 - 김이하

안부를 묻는다 - 김이하 문자로 부고가 오는 아침 남쪽 창으로 들어온 겨울 햇살이 북으로 머릴 뉘인 내 눈을 찌른다 어디 기댈 곳도 없는 삶이 그나마 뜨순 방바닥이라도 있으니 위안인가, 눈 감으면 그렁한 눈물 슬그머니 옆으로 새는 한낮 어디선가는 가스로 숨이 멎고 또 어디선가는 석탄 운반기에 감겨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나동그라졌다는 시대 무참한 주검이 실려 나가는 시대 그러고도 사람이 귀하다는 시대 나는 정녕 살아 있는가 오래 소식 없는 조카는 안녕한가 오래 돌아앉은 벗들은 안녕한가 정말 그런가 새벽 창공은 푸르렀으나 이내 찌푸리는 미간(眉間) 내 입으로 얼마쯤 멀어진 그대들 안부를 묻자니 차마 가슴이 떨려 저어하는 사이 술병이 넘어진다, 옛 애인 살던 그쪽으로 *시집/ 그냥, 그래/ 글상걸상 그냥, 그..

한줄 詩 2020.12.07

굴렁쇠와 소년 - 김재룡

굴렁쇠와 소년 - 김재룡 아우는 추운 도시의 뒷골목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내동댕이쳐져 자꾸자꾸 쓰러짐에 익숙한 굴렁쇠를 굴린다 잿빛 호숫가엔 표박(漂泊)하는 바람들이 걸어 다니고, 안개를 털며 일어선 산, 산맥 밖으로 떠나는데 우리도 실성한 가슴으로 강변을 헤매야 할까.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한기(寒氣)를 비껴갈 순 없을까. 참으면 참을수록 내부로 파고드는, 상(傷)한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바뀌고야 마는, 저 호곡(號哭)을 묻고 또 묻으면, 결국 우리의 가슴은 황폐(荒幣)해져 심장의 똑딱거리는 소리마저 독(毒)을 품게 되지 않을까. 가거라 오늘을 사는 눈물로 따스함 없이 시려운 얼굴 끝으로 자꾸자꾸 쓰러짐에 익숙한 굴렁쇠 오늘도 아우는 혼자 사는 방으로 쇳소리를 내며 굴리고 들어온다 *시집/ 개망초 연..

한줄 詩 2020.12.06

예술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 - 윤유나

예술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 - 윤유나 기다리지 않아도 눈이 오는 건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살 수 있는 방법인가 주교가 내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린 국화와 꽃말에 뒤섞여 화병에 꽂힌 태양 함께 성가를 부른다 당장 나뭇가지에 영혼을 나누어달라고 사산된 열매를 품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조작해낸다 나뭇잎, 물, 꽃, 우정 모든 언어를 품고 있는 평범한 소외 사람을 만들었지 안수에 씌어진 은총 대신 나는 나뭇가지를 생각한다 시멘트 바닥에서 이유 없이 연명하는 그래, 그게 삶일 수 있어 그런데 다 같이 노래하는 지옥은 왜 필요한가 청바지를 입은 젊은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을 크게 외친다 은총은 정말 청해야지 받을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나뭇가지를 장작불에 던져 넣는다 밤하늘 소리 ..

한줄 詩 2020.12.06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 이병률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 이병률 원하지 않는 일에도 운율은 있다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병에 걸린다면 노란색을 아무 색으로도 알지 못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임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아픔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눈을 감아도 당신이 내 눈 속에 살지 못한다면 당신이 돌아다니지 못한다면 어느 낯선 골목 안쪽 햇빛 아래에 쌓인 눈이 녹고 있다면 그런데도 많은 부분이 더 녹아야 한다면 눈의 주인이 애타게 눈을 기다리던 당신이라면 삶의 구석구석까지를 돌보는 일도 고단할 터인데 당신이 눈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눈을 편애하는 당신에게도 수고와 미안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좋은 당신 감정과 열정이 희미해진 당신 너무 바싹 말라 있거나 독이 올라 있는 몸 상태를 돌보느라 당신 사정이 더 참담해진다면 당..

한줄 詩 2020.12.02

무거운 겨울 - 박미경

무거운 겨울 - 박미경 유방 전문의라면서 왼쪽 가슴을 매끄럽게 읽는다 오른쪽 가슴이 긴장한다 반복하며 읽더니 세로로 1cm 밑줄을 긋는다 밑줄 친 곳 뜯어낸다 또 뜯어낸다 또 겨드랑이에서 네 번이나 더 콕 뜯어낸다 겁먹은 가슴 비늘이 돋아난다 그러고도 몇 년 콕콕 뜯어냈다 몸을 읽는다는 것은 어머니의 어머니 피톨조차 의심하며 과거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것 소심한 며칠 어머니가 짜주던 빵떡처럼 셀 수조차 없는 많은 구멍 속으로 바람이 숭숭 들락거렸다 미래를 읽지 못하는 빗나간 예측 결코 잊을 수 없는데 언젠가는 병이 비밀처럼 스며들 것이라면 했던 말 또 하면서도 당당하게 떼쓰는 노환이라면 싶은 긴장이 오랫동안 머물던 쉰의 한쪽 몹시도 무거운 겨울 *시집/ 토란꽃이 쏟아졌다/ 詩와에세이 해원 - 박미경 늙은..

한줄 詩 2020.12.02

골목에서 골목을 잃다 - 박구경

골목에서 골목을 잃다 - 박구경 벼룩시장에서 길을 잃고 막다른 골목을 되돌아 나오니 겨울비가 소름이 돋듯 내리는 쓸쓸한 거리였다 배달 오토바이 탈탈거리며 자장면 내려놓고 간 뒤 소주로 굳은 면을 푸는 신문 지면이 아찔하다 반바지에 커다란 운동화를 신은 힙합처럼 피둥피둥 건들거리는 덩치 큰 아이들이 침을 뱉는다 누런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단 중년의 사내가 부자로 보이던 것은 연신 흥정도 아닌 반강재 반말 투로 제 부친의 추억이 있다며 만 원짜리 지폐를 흔들고 을러대며 야코를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덜덜 떠는 초라한 사내는 아버지의 유품이다 지금은 시간을 다퉈서라도 팔아야 하지만 시간을 모르는 사정상의 한 점 시계 골목 속에서 또 골목을 잃고 생각을 재촉하는 건 비바람뿐만이 아니었다 *시집/ 외딴 저 집..

한줄 詩 2020.12.01

주기 - 홍지호

주기 - 홍지호 선물하고 싶은 날에는 미안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중얼거렸고 돌아누운 등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대답해주었다 달이 유독 크고 밝은 날에 언젠가 달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나는 미안해졌다 우리는 무엇이 달의 모양을 바꾸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보이는 것은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달이 유독 크고 밝은 날이고 그런 날은 유독 그런 날이라는 것도 돌아누운 사람아 힘든 날에 비가 비처럼 오는 날에 멀리서 집이 크게 보이고 금방 따뜻해질 거 같아도 골목을 다 걸어야 비를 다 맞아야 문 앞에 설 수 있다 무엇이 등을 보이게 했는지 나는 등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했다 달의 뒷면 보이지 않는 것도 때때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에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달이 크게 보여도..

한줄 詩 2020.12.01

무엇을 놓쳤을까 - 천세진

무엇을 놓쳤을까 - 천세진 어디에서든, 어떤 것으로든 세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가령 앞뜰이 아니라 뒤뜰에, 장미가 아니라 수국을 심은 것으로 인해 다른 세계가 태어났으리란 걸. 늘 조삼하며 살았다. 낙엽 하나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었고, 바람이 골목을 바쁘게 달려가면 길을 비켜나 담장에 바짝 붙었고, 바람이 달려가는 서슬에 아팝나무 꽃잎들이 배고픔을 하얗게 달래주는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기도 했다. 무엇을 놓쳤을까. 장미꽃잎의 무게를 잘못 가늠했을까. 수국이 세계를 비집고 들어선 공간을 잘못 측량했을까. 그도 아니면 이팝나무 꽃잎의 수를 잘못 헤아렸을까. 집으로 돌아오면 호주머니에 담았던 사람들이 건넨 이야기를 문 앞에서 비워내곤 했는데, 깜빡 잊고 집안으로 끌어들였고, 호주머..

한줄 詩 202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