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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아침 - 백인덕

우연한 아침 - 백인덕 기다리기만 하기로 했습니다 일주문 지나 바랜 잎 꼭지 위에 꽃이야 피든 말든 푸른곰팡이 몇 줌 이질(異質)의 사랑으로 위대(偉大)를 빚든 똥을 싸든 간밤 독주에 부은 목구멍 활짝 열어 싸한 숨결을 흡입합니다 죄(罪)는 어디서 오는가 죄(罪)는 어떻게 오는가 내려가는 계단은 벌써 은빛에 휩싸이고 한걸음, 그저 한 걸음이지만 나머지는 캄캄한 어둠, 모든 뒤란 살아, 아니 영원히 맞설 수 없는 얼굴일 뿐, 살의(殺意)의 미소이었든 위악(僞惡)의 만개(滿開)였든 이 아침의 새는 모두 제 이유로 날아갈 뿐입니다 말을 만나려거든 말이 오지 않는 길목에 지켜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목이 메는 말에 목을 매고 불만 가득한 볼펜을 꺼내 양손 엄지와 검지에 불을 놓습니다 검은 멍이 말갛게 씻길 때쯤 ..

한줄 詩 2020.12.16

동행 - 박윤우

동행 - 박윤우 살얼음 낀 유리컵이 창가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두리번거린다 저쪽엔 너, 이쪽엔 나, 바깥엔 겨울이 있다 개 키우지 말랬잖아! 나무라는 너와, 배고픈 개를 집에 둔 내가 30년 만이라는 한파와 동행중이다 민박집 수도꼭지는 하마 얼어 터졌다 엉덩이를 변기에 내려놓다 불에 덴 듯 일어섰다 냉기에 치를 떠는 속살, 송곳바람이 도처에 손잡이 없는 문을 낸다 늙어 죽기를 바라다가 바라던 대로 늙어 죽거나, 늙어도 죽지 않아 죽어야지 죽어야지 빈말이나 하는, 산목숨이든 죽은 목숨이든 저마다 발이 시린 밤 겨울 새 몇 쌍이 더 두꺼운 겨울을 찾아 북쪽으로 날아간다 멀리서 온 저녁은 종일 저녁, 길 바쁜 아침은 벌써 아침이다 웅크린 바닥이 일없이 내려다보는 천정을 일없이 쳐다보고 있다 해가 중천이거나 ..

한줄 詩 2020.12.15

눈물도 대꾸도 없이 - 유병록

눈물도 대꾸도 없이 - 유병록 나의 불행이 세상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고 이 춥고 어두운 곳은 이미 많은 이가 머물다 간 지옥이라는 말 알고 있습니다 순탄한 삶이 불행을 만나 쉽게 쓰러졌다고 고통에 익숙하지 않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는 말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잦아들고 잊고 다시 살아가리라는 말 고개를 끄덕입니다 모도 알고 있습니다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 유병록 참 애쓰는구나 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화관을 나와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에 간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칼국숫집이 그 집뿐이겠냐만 그 비빔칼국수와 황태칼국수를 먹지 못한다니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

한줄 詩 2020.12.15

자연의 권리 - 데이비드 보이드

나는 먹고 사는 데만 매달려 일생을 소비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가난이 밀려온다는 진리 때문이다. 큰 재산은 아니지만 오직 노동으로 번 돈을 은행에 저축하는 것이 전부였다. 누구는 주식도 사고 부동산에 투자도 한다지만 나에게는 먼 얘기였다. 언제가부터 지구 환경에 관심이 많아졌다. 기후 위기도 환경 재난도 공부를 해야함을 알았다. 나는 자동차 만드는 기술도 모르고 코로나 백신도 만들 줄 모른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러나 환경 보호에 대한 작은 실천은 하고 있다. 고난도 기술이나 대단한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가능한 적게 갖고, 적게 쓰고, 적게 먹고, 적게 버리는 것, 그리고 분리 수거를 잘 하는 것, 화장실이든 동네 뒷산이든 구내 식당이든 내가 다녀간 흔적을 가능한 남기지 않는 것, 지구에는 ..

네줄 冊 2020.12.12

누구나 언젠가는 - 박태건

누구나 언젠가는 - 박태건 벽은 등을 돌리고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수백 개의 눈을 가졌다는 신화 속 괴물처럼 수천 개의 창문으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저 벽 안에는 수백 개의 의자가 있고 수천 번의 욕설을 받아주는 화장실이 있을 것이다 들어갈 것인가 나올 것인가 사람들을 토해내고 삼킬 때만 입을 여는 벽 무엇을 바라 벽이 되었나? 수많은 모서리를 품고 벽 속에 갇힌 벽 벽에서 나온 사람들은 벽을 닮아 무언가 골똘하다 누구나 벽 앞에 서면 벽이 된다 벽 앞에 벽 벽 뒤에 벽 벽이 끝날 때까지 모퉁이로 가자 또 다른 벽을 만나자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모악 도가니집 - 박태건 늙은 아버지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장맛비 오는 전주의 오래된 식당인데 식탁은 좁아서 우린 한 식구 같다 혼자 온 사람,..

한줄 詩 2020.12.12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우면 - 황동규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우면 - 황동규 오래 정성 쏟아붓던 텃밭 지우듯 지우고 싶은 사람을 지우면 무엇이 남을까? 잡풀 웃자란 남새밭? 낙엽을 쓸다 바람 가버린 가로수 길? 새벽에 예고 없이 동파된 수도? 힘든 추억 하나 눅이려고 빌린 외딴집 새벽에 눈 그치고 물이 그친다. 물 데우는 일 거르고 눈 가득 담긴 마당으로 나간다. 흐린 하늘 아래 눈 쌓인 언덕배기 하나 가까운 신기루처럼 떠 있다. 문득 탁탁탁 소리, 눈가루가 뿌려 올려다보니. 붉은색 검은색 흰색 회색 그리고 갈색 조금, 색색으로 그러나 튀지 않게 옷 입는 새 하나가 나무 위 단색 공간에서 눈을 털고 있다. '아 오색딱따구리!' 누군가 함께 감탄하는 기척 있어 주위를 둘러본다. 뵈진 않지만 그 누군가도 나처럼 손 내밀어 눈가루 받으며 나무 위룰 ..

한줄 詩 2020.12.12

그런 저녁 - 허림

그런 저녁 - 허림 투덕적 같은 바다 보자고 동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찾아온 우울이거나 슬픔도 한몫했다 한 생이 아름답거나 쓸쓸했다고 파도가 밀려왔다 갔다 해는 산 너머로 넘어간 후였다 노을 뒤에 오는 초생달처럼 어떤 이별 뒤에 오는 사랑은 더 뜨거워지거나 싸늘한 것 그림자 먼저 내안으로 숨는 것 버리고 싶은 내안에 숨은 당신이라는 것 그대 사랑은 일몰이 지나간 서쪽하늘 별로 뜨거나 뒤늦게 찾아온 열망으로 어두워지는 것 우정 동쪽으로 가면서 저무는 수평선 위 구름은 불을 지르고 황홀하게 사그라드는지 그런 저녁 너는 또 무슨 이야기를 밤새 풀어놓는 것인지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뭔 맛이래유 - 허림 눈이 온다 오막은 눈이 내려 하이얗게 깊어진다 온 사방은 눈으로 깊어지면 옛날에 옛날에 하..

한줄 詩 2020.12.11

모래에 젖는 꽃 - 최세라

모래에 젖는 꽃 - 최세라 모레, 라고 너는 말했다 왜 찌푸리며 너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모래 위에 앉는다 왜 하필 나일까 그날은 사람이 많아 외로웠지 두서없는 대화처럼 불쑥 씨가 튀어나오는 작은 복수박을 너에게 준다 흐릿한 연두색 몸피에 옅은 줄무늬 싸인펜으로 진하게 평행선을 그어 봤자 정수리와 배꼽에서 만나고 마는 선 모른 척 해 줘, 너는 말했다 모레에 모른 척 해 줘 조화를 쥐고 있었다 진짜 꽃보다 더 진짜 같아 킬리안 향수를 남김없이 부어 줬다 남김없이 복수박의 표면을 타고 흘렀다 왜 하필 나일까 킬리안 향수와 복수박의 관계처럼 이 아픔과 평행하고 싶어 주소도 없이 통증이 몸을 찾아왔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아 모래가 닿는 자리마다 물이 고였다 왜 하필 기다리지도 않고 모레의 모래가 지금 이..

한줄 詩 2020.12.11

붉음이 제 몸을 휜다 - 김유석 시집

오늘도 좋은 시를 건지기 위해 그물망을 촘촘하게 친다. 아까운 시 빠져 나가면 다시 만날 길 요원하다. 세상의 모든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 읽는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 읽기도 누가 시켜서 숙제처럼 읽는다면 금방 싫증이 난다. 자발적 시 읽기는 좋아야만 오래 지속할 수 있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저렴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에서 시 읽기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일찍 부모 품을 떠나야 했지만 피와 살을 준 어머니와 문자를 깨우쳐 준 초등학교 선생님이 고마울 따름이다. 도서출판 상상인, 시집을 내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출판사다. 요즘 메이저 출판사 빼고도 좋은 시집을 내는 출판사가 몇 있는데 상상인 시집은 처음이다. 어쨌든 출판 불황기에 시집이 많이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몇..

네줄 冊 2020.12.08

첫눈 - 조하은

첫눈 - 조하은 육성회비 봉투를 비어 있는 채로 들고 간 날 등을 떠민 담임선생님은 빈 봉투 대신 들고 온 날고구마로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빈 봉투와 생고구마가 날아오르던 교실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의자를 들고 벌을 섰다 미열이 온몸으로 흘러들어와 마구 돌아다녔다 헛것이 보였다 운동장 귀퉁이 사시나무도 시름시름 앓았다 달아오르는 날이었다 창밖에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그렇게 배웠다 - 조하은 육성회비가 없어 집으로 쫓겨 가던 날 밤 우우 비바람이 불었다 우산 없는 운동장에 우라질, 비가 쏟아졌다 숙자 엄마가 싸다 준 거한 저녁 식사에 배부른 담임은 이미 숙직실이 떠나가라 코를 골 것이다 담임선생의 서랍 속 중간고사 답안지도 같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천둥 속에..

한줄 詩 2020.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