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Broken promises - Fausto Papetti

Fausto Papetti - Broken promises 검은 상처의 부르스라는 노래가 있었다. 어둡고 슬프면서 긴 울림을 줬던 노래다. 당시 히트를 했던 유행가 중에 흔히 번안곡이라는 노래다. 그 노래의 원곡이 이 음악이다. 가을도 떠나고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며 이 곡을 반복해서 듣는다. 이 구슬프고 아름다운 연주의 임자는 다. 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재즈 색소폰 연주자다. 1960년대 이탈리아 영화 음악의 테마 연주곡으로 한국의 올드 팝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엔 알뜰하고 살뜰한 사람이 있어 이렇게 좋은 곡을 유튜브에 올린다. 나만 몰래 혼자 듣고 싶어서 훔쳐왔다. 이런 걸 쌔빈다고 하던가. 맞다. 망할 놈의 코로나 때문에 모든 일상이 엉망인데 이런 곡이라도 쌔벼 들을 수 있어 위..

두줄 音 2020.12.01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 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들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겠는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초겨울 밤에 - 황동규 창밖엔 소리 없이 된서리 내리고 있었겠지. 밤 11시 반. 텔레비에서 말들이 날아오다 방바닥에 떨어진다. ..

한줄 詩 2020.11.30

월광소나타 - 권지영

월광소나타 - 권지영 어스름이 내려앉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울기 좋은 골목 앞에 먼저 온 달이 앓고 있다 달은 등 뒤로 이는 인기척을 알지 못하고 짙은 코발트 하늘을 향해 그렁그렁 목숨을 삼킨다 하루치의 눈물은 어디로 달려갈까 철제 대문 손잡이에 매달린 끈을 잡아당긴다 대문과 마주 보고 있는 작은 방의 현관문 그 안으로 쥐구멍 숨어들 듯 기어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잠을 청한다 다행이다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은 주인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하려 한다 울고 있는 달빛을 묻히고 들어오다 가루를 흘리지 않았던가 겉옷을 털고 신발을 소리 없이 벗었던가 인기척에 들뜬 방문이 열리지 않기를 숨 참으며 기도한다 날이 새면 다시 흔적을 지우듯 방 한 칸과 이별을 해야 할까 모두가 떠나..

한줄 詩 2020.11.30

구술녹취의 선입견 - 정덕재

구술녹취의 선입견 - 정덕재 나는 골목이 사라진 이후 생선 굽는 냄새 나지 않고 주머니에서 부딪히는 한 주먹의 구슬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주차 금지 표지판과 걸어서 넘기에 숨 가쁜 해발 4미터의 과속방지턱이 서운하다고 말했다 골목 벼람박에 좋아하는 여자아이 이름을 몰래 쓰던 백묵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던 시절이 그립다고 말했다 여든다섯 박창규 할아버지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외풍 없는 아파트에 살아 지금은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숨 참다가 숨넘어갈 뻔한 시절이 지긋지긋하다며 냄새 없는 훈훈한 화장실에서 잠이 든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찬물 따뜻한 물 마구 쏟아져 따뜻한 손으로 칠십 년 전 만났던 윤팔례의 손을 꼬옥 한 번 잡고 싶다고 말했다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

한줄 詩 2020.11.30

생은 아물지 않는다 - 이산하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돌림병으로 온 세상이 엉망이 되었다. 비행기가 멈추면서 항공사와 여행사에서 밥벌이를 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실업자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가을이 왔고 더디게 왔던 가을도 서둘러 떠났다. 나는 이때쯤이 정서적으로 가장 우울하다. 해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세 번의 고비가 있다. 봄이 꽃샘 추위와 힘겨루기를 하는 3월 말은 비교적 밝은 정서다. 반면 처서 지나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한 8월 말, 그리고 가을이 겨울에게 밀려나는 11월 말은 우울해진다. 딱 지금이 그렇다. 올해는 유독 일찍 겨울이 찾아왔다. 이산하의 산문집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기간 시를 쓰지 않고 있고 책을 자주 내지 않기에 그의 글은 귀하다. 이산하의 문장에는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처럼 쓸쓸함이 묻어난다. 무거운 주제..

네줄 冊 2020.11.30

호더스증후군 - 배정숙

호더스증후군 - 배정숙 돌지 않는 행성에서 허공은 바람을 다스리지 못한다 작년에 핀 안개꽃이 자욱한 그곳은 불우함을 개의치 않는 나만의 제국 가지고 싶은 그 안의 꽃방이다 벽은 놀랍도록 단단해서 쓸모없는 오후가 가두어지고 낮달 꼬챙이가 박혀서 기억이 빠지지 않는다 길 찾는 달그림자만 소용과 오물 사이를 빠져나간다 나비가 묻혀온 꽃가루에서 쏟아지는 것은 모두 나의 당신 그리움의 커다란 무덤 속으로 빨려들어 가면 스스로 문이 닫히고 구르지 않는 수정이 된다 구르지 않는 돌이 된다 녹지 않는 얼음이 된다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 철통같은 우주 당신의 이름을 소장하는 가치에 모두를 건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희고 따뜻하여 그곳에 영원의 무게를 묶어놓았을 때 안쪽의 광채는 다름 아닌 붉은 광기 별자리 하나의..

한줄 詩 2020.11.30

아버지의 소꿉 - 정병근

아버지의 소꿉 - 정병근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놀이는 처음엔 농사를 팔아 밥을 만드는 놀이 -힘들기는 아이고 힘들어, 할배 할매도 한입 삼촌 고모도 한입 엄마도 우리도 한입 시내로 나온 아버지는 소꿉을 바꾸었다 과자와 사탕과 하드를 팔아 돈을 샀다 우리는 새 새끼들처럼 달게 받아먹었다 -어서어서 커야지. 아버지는 문 유리로 밖을 내다보며 가게 놀이에 몰두했다 -각시가 아파요. 아버지는 틈틈이 병원 놀이를 했다 혈압계와 미음 통과 호스 같은 소꿉들이 늘었다 흩어진 우리는 숨바꼭질에 빠졌다 -얘들아, 엄마가 죽었단다. 우리는 손님이 되어 아버지의 각시를 조문했다 아무도 없는 아버지는 환자 놀이에 몰두했다 -밥도 내가 먹고 잠도 내가 자는 거야. 아버지가 죽었다 안동포 수의에 검은 유건을 쓴 아버지는 제사 놀..

한줄 詩 2020.11.29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 김희준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 김희준 나는 반인족 안데르센의 공간에서 태어난 거지 오빠는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컨테이너 박스를 잠그면 매일 같은 책을 집었다 모서리가 닳아 꼭 소가 새끼를 핥은 모양이었다 동화가 백지라는 걸 알았을 땐 목소리를 외운 뒤였다 내 머리칼을 혀로 넘겨주었다는 것도 내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문장 너 알고 있으면서 그날의 구름을 오독했던 거야 동화가 달랐다 나는 오빠의 방식이 무서웠다 언어는 풍성한 머릿결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네가 하늘을 달린다 팽팽한 바람으로 구름은 구름이 숨쉬는 것의 지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워서 구름의 생김새에 대해 생각하다가 노을이 하혈하는 것을 보았다 오빠는 그 시간대 새를 좋아했다 날개가 색을 입잖..

한줄 詩 2020.11.29

벼랑 끝에 잠들다 - 이수익

벼랑 끝에 잠들다 - 이수익 이젠 떠나가리, 믿고 약속했던 허망한 욕구여, 슬픔이여 나는 잠들어 저 높은 하늘 끝 벼랑 위에 편안한 휴식의 자리처럼 황홀하게도 부풀어 올라 안온하게 꿈꾼다 저녁별처럼 찬란하게 빛났던 저 어둠 한가운데에서 끝내 나는 백비(白碑)를 세우리 여름 지나면 가을, 가을 지나면 겨울, 그리고 봄, 나는 죽음에 길들지 않은 견고하고 투명한 입자가 되어 하늘에 섞일 것이다, 따로 또한 같이 너무나도 많은 빚 과분하게 져서 돌로 머리를 깨뜨려도 피처럼 살아 있을 평생의 죄 머얼리 구름에다 띄우고 나의 이력(履歷) 분분히 흩어져 갈 때 잘 가라, 믿고 약속했던 허망한 욕구여, 슬픔이여, 그리고 새로움이여 *시집/ 조용한 폭발/ 황금알 모서리가 불안해 - 이수익 회양목 집단이 화단을 둘러서 ..

한줄 詩 2020.11.29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 이운진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 이운진 간혹 옛일로 잠 안 오는 날 나를 그렇게는 미워할 수 없는 일이라서 운명을 미워한다 태어났지만, 버려진 것이었던 가족사처럼 지상의 법으로는 단죄할 수 없는 일로 잠 안 오는 밤 혼자라는 말이 너무나 걸맞는 시간에는 구름 한 점으로도 가려지는 머나먼 외딴섬을 떠올린다 삶보다 친절한 바람과 바다 곁에서 아름다울 수도 있었을 내 이야기는 왜 아름답게 쓰이지 못했는지 왜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이고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은 내 몫인지 차가운 혀로 나에게 해명한다 말해 주어도 믿을 리 없고 믿는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난처한 생을 안고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을 다해 내가 슬픈 이유는 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

한줄 詩 202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