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슬픈 축제 - 김종필

슬픈 축제 - 김종필 사랑은 언제나 온유함을 손가락으로 그려내는 그들 사이를 막고 있는 무수한 벽을 우렁찬 박수로 깨뜨려야 하지만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다 눈으로 듣는다는 것이 마냥 슬프다 손으로 말하는 그들은 결코 울지 않는다 점점 눈이 커지는 춤과 노래 십자가가 사랑이 아니거늘 세상을 등지지 못하는 꽃들이여 내 멀쩡한 다리가 부러지도록 목발을 던져라 일그러진 얼굴에 침을 뱉어라 체념을 중심으로 도는 무대 위에 스스로 꽃이 되어라 남들이 기쁘게 웃으면 얼굴이 왜 차갑게 일그러지는지 남들이 사랑으로 가슴이 뜨거울 때 가슴이 왜 얼어붙는지 말할 수 없음에 볼 수 없음에 걸을 수 없음에 결코 온유한 사랑을 구걸치 않는 맹세 저마다 타고난 멍에가 눈부신 꽃이 되리라 *시집/ 무서운 여자/ 학이사 마음이 아픈 ..

한줄 詩 2020.10.30

한때 저녁이 있었다 - 천세진

한때 저녁이 있었다 - 천세진 한때 저녁이 있었다, 시침이 덜컥, 덜컥 움직여 기울어간 어느 시간이 아니고, 석양이 산꼭대기에서부터 산자락을 향해 내쳐 달려들 때 두려움으로 염소들의 동공이 더 커지기 전에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런 저녁이었다. 밤나무에 올라 나무를 흔들어 밤을 터는데, 동생들이 떨어지는 밤송이를 피하며, 조금 있으면 어둠이 곳곳에서 버섯처럼 돋아나 떨어진 밤송이를 주울 수도 없다고 소리치던 그런 저녁이었고, 들마루에 앉아 저녁을 먹으려던, 생쑥을 잘라 모깃불을 피워 올리던, 그런 저녁이었다. 한때 저녁이 있었으나, 그 저녁이 오래 가리라고 믿었으나 이제 저녁은 가고 없고, 모깃불 연기도 밤송이의 낙하도 멈추었다. 한때의 저녁이 지금 스며들고 있다. 석양이 와서 말하길, 수십 ..

한줄 詩 2020.10.30

지는 사랑 - 권혁소

지는 사랑 - 권혁소 낡아보니 사랑할 나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겠다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나이만큼만 사랑을 할 뿐 그런 건 없다, 하물며 이제 막 헤엄치기를 마치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그대에게야 말해 뭣 하겠는가 사랑을 잃고 시를 얻다니, 이런 행위가 삶을 경외하는 마지막 자세라고 슬픈 자위를 해보긴 하지만 더 많은 상처를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휘파람을 불어주는 일도 버겁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이 저문다 숨자, 어느 숲에든 몰래 들어가 조용한 바람에도 격하게 이파리를 떠는 관목(灌木)이라고 되자, 그대와 나 비록 실패하는 사랑에 매진했으나 아직 세상엔 못다 한 사랑이 많이 남았으니 사랑이 진다고 싸움을 부를 일만은 아니다 저..

한줄 詩 2020.10.30

당신은 내 국경이다 - 김대호

당신은 내 국경이다 - 김대호 내 인생에 필요한 무엇 하나를 얻는 데 너무 많은 세월을 투자했다 비효율적 투자였다 아플 때 바로 쓰러지는 일은 효율적이다 멀쩡하게 살면서 중요한 구조는 다 쓰러져 있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 내 몸의 체적에 인접한 곳 국경이 있었다 당신이 내겐 국경이다 모국어를 버리고 국경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말을 더듬었다 국경을 앞에 두고 술을 마셨다 어떤 연애도 내 안에 번지는 산불을 진압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낯선 나라에서 온 그대가 국경이 되어 나와 누군가를 구별하기 힘든 둘레에다가 굵고 깊은 금을 그었다 나는 그 국경 근처 비효율적인 몸짓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내 현재가 될 때까지 어눌하지만 지속적인 신호를 보냈다 당신이 내 암호가 되고 내가 국경을 넘는 날 강의 수위가 낮아졌..

한줄 詩 2020.10.29

공명음 - 박미경

공명음 - 박미경 문을 닫은 지 이십 년 훌쩍 지난 정미소 환삼덩굴 덮어쓰고 도깨비 풀밭에 주저앉았다 한 뼘은 족히 넘는 벨트가 바닥에서 천장으로 흐룰흐룰 몇 바퀴 돌고 나면 소에 떨어지는 물처럼 졸졸 포대기 속으로 흰쌀이 흘러들었다 나무 소리도 쇳소리도 아닌 음 귀를 막고 올려다보면 엉성한 양철지붕과 시멘트벽 사이 활모양의 틈으로 먼지는 반짝이며 날아가 햇살이 되었다 늦가을 아랫마을 사람들까지 복작거리며 옆 작은 방앗간에서 쌀가루 고춧가루를 빻기도 하던 정미소에는 텔레비젼도 있었다 세상일에는 꼭 절정이 있어야 했을까 강가에 놀러 갔던 정미소 아들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삼십 리 밖에서 발견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세상 살기 싫은 아픔 존재한다는 것을 그해 정미소 벽 담쟁이 붉게 물들어 접근금지 목책을 그으며 ..

한줄 詩 2020.10.29

태양계 가족 - 조우연

태양계 가족 - 조우연 중심에 엄마가 있었고 영원한 빛에너지이며 생명의 근원이었다. 절대 꺼지지 않을 우리 모두의 태양. 태양 가장 가까운 궤도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오빠는 자신의 불안정한 운행에도 딸린 위성 셋을 달고 태양을 돌고 있다. 1억 년은 더 늙어 보인다. 이런저런 사고를 치던 나를 두고 탄생 시기의 부적절성과 타고난 대기 성분의 부조화 진단을 내린 적이 있으나 지금도 나는 삐따닥한 기울기로 나만의 궤도를 돌고 있다. 술 마신 날엔 거꾸로 돌기도 한다. 서로의 중력에 못 이겨 맞물려 돌고 있는 남편과 나, 광활한 우주에서 부부의 연이 결코 가볍지는 않겠으나 떠돌이별의 근원적 궤도이탈 갈망을 이해하는 게 좋지 않겠나. 광원도, 마땅한 행성도 되지 못하고 숫자로 명명된 아버지는 경로당과..

한줄 詩 2020.10.29

달이 떠서 기뻤다 - 박구경

달이 떠서 기뻤다 - 박구경 다 감 농사 잘 지은 마을 사람들 덕이다 커다란 다라이에 작은 달들이 가득 담겨 있다 구름이 걸린 것처럼 작은 달 하나에 감잎을 달아 놓은 것이 화가의 마음이다 달 하나를 깨물어 달의 씨 속에서 오래 전에 놀던 숟가락을 보니 달 따다 다친 이도 달 따다 벌에 쏘인 이도 그만 어려져서 열 살 적 얘기를 하고 일곱 살 시절이 가로막아 가며 타작마당에 그 무슨 기운이 굴러다닌다 이게 다 감 농사 잘 지은 마음 덕이다 달상자를 트럭에 가져다 싣는 택배 총각 주소와 전화번호를 연달아 묻는다 달에게 달을 닮은 사람들에게 *시집/ 외딴 저 집은 둥글다/ 실천문학사 노무현을 추억하다 - 박구경 1 저 환한 들판에 이따금 그가 들르면 삐딱하게 기운 자전거 위에서 밀짚모자 건들멋으로 쓰고 발 ..

한줄 詩 2020.10.28

비둘기 일가 - 손택수

비둘기 일가 - 손택수 건물 외벽을 뚫고 나온 온풍기 연통이 비둘기들의 횃대로 바뀌었다 연통 아래 묵은 신문이 깔려 있다 시어머니 똥수발만 일곱 해를 했는데 비둘기 똥수발까지 한다며 오늘도 신세한탄을 하는 여자 어찌 된 세상인지 비둘기들도 피똥을 싼다고, 아침마다 신문 기저귀를 간다 피똥은 나도 싸봤다 발목을 절룩거리며 길바닥을 쪼는 부리질 따라 날갯죽지 퍼득거려도 봤다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새는 새라고 더 다가오지 말라 퍼들쩍 틈을 벌리고 알량한 한 뼘 틈으로 겨우 나를 달래도 봤다 늙으면 괄약근이 먼저 풀어진단다 너희 아비도 화물을 지고 계단을 오르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있었어 버린 속옷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오던 것 기억나니 가신 아비 생각에 착잡하게 담배를 무는 베란다 어느 횃대 아래 어깨..

한줄 詩 2020.10.28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오면 - 김인자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오면 - 김인자 내 할머니가 가고 내가 왔듯이 내 어머니가 가고 내 아이가 왔듯이 내가 갔을 때 내 손자가 오는 일처럼 한 사람이 가고 한 사람이 온다는 말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온다는 말 따듯해서 좋다 여름이 반 가고 겨울이 반 온 자리 구절초 언덕으로 소풍 나온 이 가을도 첫 밤처럼 다정하니 좋다 참 좋다 더러 생각지도 못한 곳에 급류가 기다릴지라도 강물은 그렇게 흘러갈 때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가을이 짧아야 하는 이유 - 김인자 농로를 따라 산 중턱으로 향한다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은 따사롭다 비탈밭에선 배추를 수확하는 농부와 늦감자를 캐는 사람들이 새참 중이다 이 산골까지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 보인다 묻지도 않았는데 고향이 방글라데시 다카..

한줄 詩 2020.10.28

들국화는 피었는데 - 김재룡

들국화는 피었는데 - 김재룡 총알은 왼쪽 등 뒤에서 견갑골을 부수고 겨드랑이 동맥을 끊으며 야전잠바 윗주머니를 뚫었다. 제3야전에서 7일이 지난 후에야 59후송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총상은 총창이 되어 썩어들어 갔다. 이제 겨우 스물셋인데. 환부에서 죽음의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 한 달 넘게 버텼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며 이름을 불렀을까. 둘 지난 아들. 아 아내. 옹진 강령 땅. 3.8선이 생겼다는 두락산 돌모루에서는 아래쪽 두 사람이 조선낫에 찍혀 죽었다고 했다. 대신에 까치산 말뚝이고개 너머 며느리바위에서 위쪽 사람이 도끼로 목이 잘렸다는 소문을 들은 아이들은 몇 번씩 자기의 목을 어루만졌다. 음력 오월 초열흘. 유월 이십오일. 둘째 형이 휴가 나왔다 귀대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전쟁이 터진..

한줄 詩 2020.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