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이력 - 김유석

이력 - 김유석 싸락눈 몇 됫박 들판에 안치는 저녁이다. 작년에 끌고 간 줄 토막토막 끊어 오는 기러기 울음 굴핏한 어스름. 부메랑 날갯죽지들 붐비는 공중을 바라보며 한 철 들러 갈 것들에게 또다시 가슴을 앗긴다. 어느 추운 고장의 습속일까, 바닥을 짚기 전 몇 번이나 파닥거리는 뜨내기들. 제 기척에도 놀라는 것들은 저런 식의 설은 기억법을 가지고 있어서 한 곳 정들지 못하고 떠도는 것일 게다. 공중을 건널 때와 바닥에 내리는 울음이 설핏 다름을, 가뭇없는 작은 애비 기별인 냥 초저녁잠 설치는 서당집 노모 가는 귀 섧도록 주인 바뀐 논배미에 주둥이를 박고 우는 것들의 발목이 붉다.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상상인 십일월 - 김유석 새들이 왔다. 그 전날, 먼 이역 순회공연을 돌아온 가수의 쉰 목처..

한줄 詩 2020.11.12

노을에 기대어 - 성선경

노을에 기대어 - 성선경 가을의 단풍을 보려거든 그 자태만 볼 게 아니라 그 아득함을 보아야 하리 저녁의 노을을 보려거든 그 붉음만 볼 게 아니라 그 막막함을 보아야 하리 수령이 사백 년이라는 고향 어귀의 두 그루 은행나무와 두 그루 느티나무가 단풍 들었다 아득하게 막막하게 단풍 들었다 저녁노을도 곱게 단풍 들었다 아버지 가신 지 꼭 일곱 달 만이다. *시집/ 네가 청둥오리였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파란출판 11월 - 성선경 다시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노래여 그리움 목메이게 마음껏 붉어라 나는 지금껏 돌아가고 싶은 그날이 없어 내 흰 머리칼은 단풍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서슬 푸르던 세상의 잎들이 노랗게 빨갛게 물이 들 때 노래도 사랑도 낙엽처럼 다 잊히는 이미 한 해도 다 지난 옛일 이제 내 마음..

한줄 詩 2020.11.12

겸상 - 전영관

겸상 - 전영관 절름발이 연인의 걸음에 맞춰 걷듯 천천히 꾸준히 오는 저녁 나이든 남자의 눈물처럼 잠깐이지만 세상이 무거워지는 가을비 일기예보가 정확히 맞으면 안심되다가 두려워진다 밀려드는 어둠을 밀치고 방안을 지켜내는 형광등이 힘겨워 보인다 아내가 미소 지을 때마다 이 별 어딘가에서 목화가 푹신하게 피어날 것이다 매달려 버티다가 가을비 핑계 삼아 못 이기는 척 흙으로 돌아오는 이파리의 나날들이다 밥벌이 때문에 가장이라는 버스가 되어 과속했다 갓난쟁이 아들 둘을 태웠는데 청년이 되면 내릴 것이다 습성인지 의자가 비었는데도 한동안 노선을 돌았다 김치부터 된장을 거쳐 토닥이는 도마 소리까지 아내의 저녁 준비 속도에서 살림이 늘던 때를 생각한다 거쳐온 모퉁이들을 돌아본다 영혼에게 안부 건네듯 겸상하며 평생의 ..

한줄 詩 2020.11.12

상처의 향기 - 정기복

상처의 향기 - 정기복 새털 같은 제 삶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에 겹다는 듯 스산하게 낙엽 지는 날 고향 집 마당 들어서다 갈바람 쏠려가는 측백나무 울타리 밑 마침 생장을 마친 모과 하나 툭 떨어져 뒹구는 것을 얼결에 흙먼지 털고 주워 든다 어머니 한 눈 상하신 채 살아낸 세월이 노란 모과 닮았다는 생각 불현듯.... 무심히 책장에 놓아둔 그놈 은은히 향기 뿜어내는 게 아닌가 다가가 살펴보니 제 살 썩혀 발하는 저 놀라운 살신성인 어머니 상처의 향기 내 몸 가득 짙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내 가거든 두 아들에게 - 정기복 허깨비를 애비로 둔 죄라면 죄 의상능선 의상, 용출, 용혈, 증취, 나월, 나한, 문수 일곱 봉우리에 뿌려라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바위와 소나무 밑동에 흩어놓아라..

한줄 詩 2020.11.11

11월 - 박시하

11월 - 박시하 젖은 낙엽에서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한 채 누군가의 얼굴을 길게 그렸다 보석처럼 빛나는 젖은 낙엽에서 가느라단 비명처럼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등이 지진처럼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투명해도 되는 걸까 우리는 이렇게 자꾸만 열리는 푸른 문을 갖고 있어도 되는 걸까 낙엽을 밟으면 젖은 발자국 발자국을 남기며 사라지는 우리에게는 죽은 잎사귀들이 살아간다고 믿어서 그들에게 무게를 지우고 천천히 사라지는 우리에게는 삶이 있을까 그런데도 열리는 문은 무엇일까 저 차갑고 선명한 문은 왜 닫히지 않는 걸까 *시집/ 무언가 주고 받은 느낌입니다/ 문학동네 가을 - 박시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서늘한 첫 바람 옆에서 걷는 사람의 온도 달이 둥글어진다는 사실 구름이 그..

한줄 詩 2020.11.11

눈물에도 전성기가 있다 - 이운진

눈물에도 전성기가 있다 - 이운진 그리워하고 싶은데 그리워지지 않는 날이 오는 것처럼 누구의 생애쯤이든 다시 만나자던 약속을 잊는 것처럼 시든 꽃다발 속에서 나오는 바람처럼 결국, 사랑처럼 눈물도 고비를 넘긴다 내 심장과 가장 가까웠던 말을 잃고 제아무리 눈이 슬퍼도 이제 눈동자는 잠기지 않고 눈 속에는 있으나 마음속에서는 사라진 눈물에게 눈을 찔리고 웃을 때 한때는 익사(溺死)의 깊이로 흐르던 눈물 더 이상 맺히지 않는다 눈물에도 전성기가 있었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검은 눈물 가득한데 - 이운진 세상은 이 정도의 슬픔으로는 흔들리지 않나 보다 바닷속에서 잠든 아이들 면도날처럼 야위어가는 아기들 폭풍우에 사라진 마을 전쟁터의 낮과 밤 어제도 십 년 전에도 수백 년..

한줄 詩 2020.11.08

아득한 독법 - 조하은

아득한 독법 - 조하은 청보리 수런거리는 오월의 밭을 지날 때나 늦가을 낡은 소매에 영혼이 깃들 것 같은 날 낮과 밤 사이에서 나의 걸음은 보풀이 일었다 똑바로 걷는 법을 잊어버리는 두 다리는 일생이 느렸고 어디든 멀었다 지칭개나 망초 순을 따며 여린 것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깊은 강바닥 어둠 속에도 생의 질문이 흘러가듯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에서 겨울나무는 은유를 낳았다 반듯하게 걸어도 여전히 한쪽으로 기우는 걸음의 방식도 통점마저 제 안으로 끌어안아 아침을 일으키는 들풀도 꽃이었다고 서쪽 하늘 붉어지는 저녁마다 짧은 발목에 굵어진 생의 이야기를 은총으로 읽는 아득한 날 다 잃어도 홀로 떠나는 짐승처럼 절룩이며 걷는 나의 삶은 누구보다 올곧은 직립의 걸음이었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

한줄 詩 2020.11.08

늦가을 달맞이꽃 - 한승원

늦가을 달맞이꽃 - 한승원 찬바람 줄달음질하는 늦가을 농수로에 투영된 서역으로 떠나가는 이른 아침의 창백한 달그림자를 심호흡으로 빨아들인 흰나비 같은 내 넋을 훔쳐 가곤 하는 달의 상아(孀娥)여신을 애인이라고 여기는 망상 한 자락 간밤 그대 잠깐 내려와 내가 밟아갈 산책길 가장자리에 내 차가운 가슴을 덥히기 위해 호오, 호오 불어 놓았구나 여신의 입 비린내 나는 황금빛 뜨거운 숨결을 *시집/ 꽃에 씌어 산다/ 문학들 내 허벅다리에 각인된 만월 - 한승원 심하게 흔들릴 때면 내 허벅다리에 각인된 만월이 생각나고 창공에 드높이 뜬 만월을 보면 그것이 알 수 없는 흔들림의 세계로 미끄러지는 나를 붙잡아 주곤 한다 처음 흔들리는 삶을 경험한 것은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덕도의 집에서 대덕..

한줄 詩 2020.11.08

나의 아름다운 벽 속에서 - 이소연

나의 아름다운 벽 속에서 - 이소연 여기 나의 아름다운 벽이 있어 그대 속눈썹이 빛나는 그곳에 악기점이 있는 것처럼 불면을 들쳐 업은 소음은 즐거운 노래 쓰레기 매립지를 떠도는 중금속의 먼지로 배를 채울래 나는 벽과 벽이 만든 모서리 딱딱하게 자라나 내게 노래가 되어주는 그대는 나로부터 가장 가까운 벽의 기척들 그러니까 오늘은 지평선 저편으로 차들이 두런두런 교차하는 사거리를 밀고, 오래 묵은 담배 냄새가 피어나는 벤치를 밀고, 괄호로 치장한 장미들의 이상한 향기를 밀고, 별의 이빨들이 숨어살고 있는 쥐들의 구멍을 밀고 밀어서 나는 내 속의 나침반을 잃어버렸지 환청에 시달리는 차도는 몸이 지쳐 녹아내렸지만 어둠을 그냥그냥 모자이크 처리하는 꿈을 꾸네 나의 아름다운 벽 속에서 그대 날개를 꿈꾸는 화석이 되..

한줄 詩 2020.11.07

나는 코끼리다 - 유기택

나는 코끼리다 - 유기택 사는 건 순전히 죗값이다 아버지며 어머니며 형들이며 남은 심지, 까맣게 타들어가다 맥없이 툭툭 부러지던 며칠을 나는 속마음을 먼저 놓았던 죗값이다 세상 어딘가에 코끼리 무덤이 있다고 들었다 너무 환해 차라리 놓으라 한 반지빠른 속말을 희미하게 웃던 그리움에 편히 사위어 가라 차마 못한 말을 죄 탕감하며 본 이젠 누가 내게 거짓말을 하게 될지도 아는 코끼리는 그때가 오면 스스로 무리를 떠난다고 했다 떠난 그 계절마다 돌아온 무리가 그를 맡고 간다고 자기 생의 기도처럼 머물다 떠난다고 했다 살아남은 것이 미안하지 않도록 어디 코끼리 무덤이 있다고 했다 *시집/ 호주머니 속 명랑/ 북인 0이 1로 비워지는 동안 - 유기택 시월이 마지막 가던 날 저녁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바람이 저물어..

한줄 詩 2020.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