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눈독 - 우남정

눈독 - 우남정 오래된 습관이 북쪽으로 기울었다 올해도, 그가 건네준 모과 한 알 창가에 안치한다 갓 면도를 끝낸 듯 턱선을 타고 그의 향기가 번진다 연둣빛 윤기가 도는, 잘 익은 노랑은 왜 터무니없이 짧을까 연하디연한 분홍 꽃의 열매가 과즙도 없고, 근육질인 것도 아이러니지만 욕창이 나지 않도록 이리저리 체위를 바꾸어 주어도 어디에 부딪힌 것처럼 멍이 번지고 반점이 하루하루 깊어지는 건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저 어둠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을까 노랑을 먹어치우고 서서히 꽃을 피우는 저 농담(濃淡)은 슬픔이란 저런 것인지도 모른다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미라가 되어가는 모과를 바라보는 일 서리 내리기 전, 서둘러 석탄 한 덩이 품는 일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한줄 詩 2020.11.06

풍경에 속다 - 김정수

풍경에 속다 - 김정수 오죽 못났으면 허공벼랑에 매달린 배후일까 범종도 편종도 아닌 종지만 한 속에서 소리파문 파먹고 사는 주춧돌 위 듬직한 기둥이나 들보 서까래도 아닌 추녀마루 기와의 등 타고 노는 어처구니 잡상만도 못한 항상 바람과 놀고 있는 풍경은 무상이려니 눈곱때기 창이나 벼락치기 문이려니 오죽 힘들었으면 죽음 끝에 매달려 살려 달라 살려 달라 스스로 목을 맸을까 10년 행불 소리 소문 없이 보내고 보니 어딘가 끝에라도 매달려 손등 문지르고 싶은 숨과 숨 사이 진짜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바람에 풍경 들여 불이었음을 같은 것 하나 없는 빠끔, 원통인 것을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담쟁이덩굴, 화사한 - 김정수 요양병원 창가에서 가을의 휴일을 보네 바위의 손등으로 화사 한 마리 기어가네 새..

한줄 詩 2020.11.06

옛 편지 - 허림

옛 편지 - 허림 옛 애인의 편지를 읽는 저녁이다 아니 별처럼 뜬 안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오래도록 마음에 둔 시간이 참 길다 주홍의 꽃들이 피고 지는 동안 애인도 나도 늙었다 향기도 빠지고 빛깔도 낡아 누추한 햇살을 깔고 앉아 깊은 주름을 말린다 가을처럼 그대가 벗어놓은 삶이 무엇이든 한때 들려주던 매미라 한들 나는 아직도 그리워하는 중이다 사랑하지 않아도 될 것을 사랑하여 고독해지는 저녁 옛 애인의 편지를 읽으며 물처럼 깊어지는 시간의 무늬들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 더 그리웁다고 절절했던 어둠을 읽는다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이맘때 - 허림 살다보니 약속 지키지 못한 날들 많았구나 은가락지 하나 손가락에 끼워주지 못한 첫사랑도 사랑해 사랑 귓속에 꾸겨 넣던 날도 안개가 눈부신 아침 ..

한줄 詩 2020.11.03

시외버스터미널 - 박철영

시외버스터미널 - 박철영 비라도 오는 날이면 허리 통증이 도지듯 누군가를 떠올리며 간절해질 때가 있다 오랜 유물 같은 소읍(小邑)의 시외버스터미널은 빗물에 퉁퉁 불은 추억을 들이민다 의자처럼 말 없던 사람들 잃어버린 차표를 찾듯 가슴에서 몽글대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떠나버린 차표를 손에 쥐고 다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듯 보따리에는 찾아가지 못할 주소가 빼곡하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 기어이 추억을 터뜨리고 말지만 오래전 떠난 친구 소식은 없다 *시집/ 꽃을 전정하다/ 시산맥사 만국(滿菊) - 박철영 가을이다,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계절이 왔다 등 뒤로 축축이 젖어 눈물 같던 시간은 다 말라버린 채 이제 남은 것은 다들 외면하고 에돌아가는 상엿집이 있었다는 동청처럼 써늘한 그림자가 세 들어 산다는 ..

한줄 詩 2020.11.03

가창력 - 홍지호

가창력 - 홍지호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노래를 못한다네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지만 노래를 부른다고 모두 가수가 될 수는 없다네 노래는 노래를 낳지만 가수가 가수를 낳는 건 아니라네 호흡 호흡이 찗은 그는 자주 숨을 쉬어야 하며 선곡 언제나 저음과 고음이 많은 어려운 노래를 고른다네 한 번도 노래를 가지고 놀아본 적이 없다네 히트곡 아무도 그의 노래를 기억하지 않는다네 다만 그는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가수고 노래를 잘하지 못한다네 무대에서 떨고 있다네 떨림만이 그의 노래를 지탱하고 있다네 떨림으로 밴드는 멈추지 않는다네 노래한다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노래를 못한다네 그것은 슬픈 일이라네 그것이 슬픈 일인 이유는 노래가 끝나도 아무도 박수치지 않아서 앙콜을 외치지 않아서도 아니라네 노래를 못하는 그에..

한줄 詩 2020.11.02

누군가가 떠나갔다 - 김종해

누군가가 떠나갔다 - 김종해 바람이 분다 천지에 낙엽이 흩날린다 한 시절 삶을 끝내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나뭇잎은 저마다 몸속에 제 이름을 새긴 문양이 보이고 투신하기 전에 껴안고 살았던 아찔한 벼랑 하나가 보인다 이 세상의 삶을 끝낸 누군가가 먼길 떠나기 전 그곳의 벼랑 평생 낮은 곳에서 뜻을 벼룬 사람은 하늘에 올라 별이 되고 나뭇잎은 지상으로 내려와 슬픈 이름을 받든다 하늘과 지상의 경계 사이에서 바람은 불고 벼랑 하나씩을 껴안고 서로 이름을 부르며 나뭇잎은 떨어져서 누군가가 떠나간 가을을 적멸(寂滅)로 물들게 한다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 문학세계사 만추, 낙엽들을 지휘하다 - 김종해 바람이 분다 민감하게 연출하는 지휘자의 손 붉게 혹은 누렇게 허공으로 느닷없이 뛰쳐나와 흩날리는 나뭇잎이 천..

한줄 詩 2020.11.02

지나가는 바람 - 이병률

지나가는 바람 - 이병률 ​ 그때 난 인생이라는 말을 몰랐다 인생이라는 말이 싫었다 어른들 중에서도 어른들이나 입에 달고 사는 말이거나 어쩌면 나이들어서나 의미를 갖게 되는 말인 줄로만 알았으며 나는 영원히 그때가 오게 되는 것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나한테 인생이 찾아왔다 굉장히 큰 배를 타고 와서는 많은 짐들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앞으로는 그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하나 풀어봐야 한다고 했다 좋은 소식 먼저 들려줄까 안 좋은 소식 먼저 전해줄까 언제나처럼 나에게 그렇게만 물어오던 오전 열한시였는데 예고 한 번 없이 여기 구석까지 찾아왔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사람의 금 - 이병률 많은 청귤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고 몇 바늘을 꿰맸다 나는 평생..

한줄 詩 2020.11.02

망원 - 전형철

망원 - 전형철 1 그는 생각보다 키가 크고 엄지와 검지로 만든 동전은 잠시 거인의 눈을 빌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2 거인의 눈을 목에 걸고 목성의 두 행성을 염려한다 오늘의 날씨와 부고란을 뒤적이며 우산과 검은 비옷의 비율에 대해 고민한다 맨눈에 두 행성은 뿌연 버스 창 같을 테지만 동전은 무겁다 땅에서 멀어질수록 무게는 줄어들고 사람은 공중에 던져지면 사지를 벌리게 마련이다 비행과 낙하 사이 질량과 중력에 시험 든다 눈을 감고 간절히 두 행성과 멀어져 다른 행성에 내리고 안도한다 신은 거인의 눈 사이에 있다 3 지난 세기까지 믿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는 바퀴들이 다급하게 속력을 줄이다 후진해 돌아왔다 잠시 머뭇거린 순간, 거인은 몸집에 비해 힘이 세 보이는 것은 믿는 것이 되었다 언덕에서 그..

한줄 詩 2020.11.01

주름에 관한 명상 - 김일태

주름에 관한 명상 - 김일태 속을 비운 것들은 나이테가 없다 지나온 저를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나이는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지운 탓이다 살다 보면 옳다고 잘했다고 동그라미 쳐줄 수 있는 때 과연 몇 번이나 되랴 속을 비운 것들은 나이테 대신 역정을 돋을새김 한다 주름이라는 명징한 장부에 *시집/ 파미르를 베고 누워/ 서정시학 모서리에 부딪히다 - 김일태 화장실 가다 침대 모서리에 정강이가 부딪혔다 누구를 탓 할 수도 없어 혼자 투덜거렸다 나이 들어가며 자주 부딪히는 게 책상이나 식탁뿐만 아니다 일상의 각진 데에도 쉬이 부딪히며 잔소리 또한 많아진다 인지능력 떨어지고 건망증 심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아내는 학술적으로 얘기하지만 나는 섣부른 예단 때문이라고 여긴다 촉각이 뽀족할 때는 그런 일 없다가 왜..

한줄 詩 2020.11.01

새의 운명 - 백무산

새의 운명 - 백무산 알에서 깨어나 처음 거두어준 손길을 어미로 알고 일생 한 사람을 따르는 새들이 있다지만 태어나 누구보다 일찍 내 곁에서 울어준 새 한마리를 나는 어미로 따르고 있네 홀로 깨어나던 백색의 여름 낮 현기증에 눈도 뜰 수 없던 그 새하얀 마당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쟁쟁 내 귀를 파먹으며 울던 새 하던 일도 놀던 일도 다 털고 따라나서게 하던 그 울음소리 그를 따라 험한 곳으로 가파른 곳으로 다리가 부서지고 피투성이 되기도 했네 내게 젖꼭지 대신 좌절을 물려주고 안아주던 대신 버려졌음을 알게 했네 날개도 발도 낳아주지 않았고 언제나 내게 허기를 물려주던 새 견딜 수 없어 그를 떠나려고 했네 모든 불행을 안겨준 그 소리에 귀를 막았네 그러나 잠시뿐 어느날 문밖에 그 소리 찾아왔네 나의 어린 ..

한줄 詩 202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