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들국화는 피었는데 - 김재룡

마루안 2020. 10. 28. 21:35

 

 

들국화는 피었는데 - 김재룡

 

 

총알은 왼쪽 등 뒤에서 견갑골을 부수고 겨드랑이 동맥을 끊으며 야전잠바 윗주머니를 뚫었다. 제3야전에서 7일이 지난 후에야 59후송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총상은 총창이 되어 썩어들어 갔다. 이제 겨우 스물셋인데. 환부에서 죽음의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 한 달 넘게 버텼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며 이름을 불렀을까. 둘 지난 아들. 아 아내.

 

옹진 강령 땅. 3.8선이 생겼다는 두락산 돌모루에서는 아래쪽 두 사람이 조선낫에 찍혀 죽었다고 했다. 대신에 까치산 말뚝이고개 너머 며느리바위에서 위쪽 사람이 도끼로 목이 잘렸다는 소문을 들은 아이들은 몇 번씩 자기의 목을 어루만졌다. 음력 오월 초열흘. 유월 이십오일. 둘째 형이 휴가 나왔다 귀대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전쟁이 터진 줄도 모르고 동생과 조카를 데리고 낚시를 갔다. 해가 퍼지기 전이었다. 우리들을 찾아 나섰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장터 다리목에서 난사를 당했다. 저녁 무렵에 집에 들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셋째 형이 우리를 보고는 돌아서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가마니에 덮여 버려졌던 시신은 사흘이 지난 후에야 작은아버지와 셋째 형이 수습했다. 그날. 옹진 부민면에서 죽은 사람은 어머니와 아버지 둘뿐이었다. 면 사람들이 다 알았다.

 

열일곱 살이었다. 휴가 후 귀대 일주일 만에 전쟁이 터져 소식을 알 수 없는 둘째 형. 열아홉 셋째 형은 연평도로 피했고 나는 인민의용군으로 전장에 내몰렸다. 전장이 옮겨 다니는 동안 무수한 주검들이 온 산하를 뒤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연보랏빛 들국화는 피고 있는데 늘 배가 고팠고 포탄이 터졌고 힘겨운 야간 이동이 있었다.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주검은 넘쳐 났다. 반공포로라는 이름으로 풀려났다. 임진강이 가까운 감악산 가까운 구암리 이장 집에 맡겨졌다. 영국군이 떼죽음을 당한 설마치 근처였다. 전쟁이 끝났으나 옹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두 해가 지났다. 장터 가는 길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토이기군도 모두 떠났다. 이장인 형님 집에서 아내를 맞았고 아들을 얻었다. 혼사를 극구 말리던 앞을 보지 못하는 장모가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 후에 자원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처형 집이었지만 의탁되어 머슴처럼 얹혀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군대 갔다 와 동두천 미군부대 다니면서 자리를 잡아야 했다. 이듬해 봄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의 외할머니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휴가를 내 장례를 치렀다. 아이를 업은 가여운 아내는 어머니를 묻고 온 앞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다.

 

가을에는 다시 휴가를 나와 타작을 도왔다. 귀대할 때 아이를 업은 아내가 신작로까지 따라 나오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길섶에는 구절초며 벌개미취 쑥부쟁이 따위의 감국들이 흐드러져 있었다. 김화지구 육 사단 칠 연대 수색대. 어차피 휴전 중인 나라의 군대 생활이었다. 포로수용소 생활까지 견뎠고 한 아이의 애비였던 나에게 남쪽의 군인들은 짐승 같았다. 어차피 짐승 같은 시절이었다. 선임은 유별나게 괴롭혔다. 집단 가혹행위를 일삼는 것에 항의했고 시정을 요구했다. 상관에게 보고하겠다고 돌아서 가는 등 뒤에서 카빈소총 방아쇠가 당겨졌다. 초겨울 눈밭으로 거꾸러졌다. 눈에 덮히지 않고 솟아 있던 한 무더기의 마른 들꽃들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며 흐려져 갔다.

 

아내가 어린 아들을 업고 후송병원을 찾아왔다. 또다시 눈물짓는 아내를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동안 아이는 병상을 아장 아장 오가며 잘도 놀았다. 보리밥에 짠지 쪽을 얹어 주니 넙죽 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마지막이었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다녀간 며칠 후 후송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스물넷이었다.

 

 

*시집/ 개망초 연대기/ 달아실

 

 

 

 

 

 

천장지구(天長地久) - 김재룡

 

 

너무 멀리 가지는 말자

그 사람과 나 사이만큼만

바람이 불도록 하자

새로 얻은 뜨거워진 심장에

불가능한 꿈

부풀어 터져버린 희망을 탑재하는 거다

그냥 바람통 하나 붙이고

같은 별에 닿아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꼭짓점에

같은 하늘을 두고

그 별에 아무도 모를

이름 하나 지어주자

 

 

 

 

# 이 긴 시를 언제 다 필사하나,, 늦게 핀 들국화 향기처럼 묵직한 울림이 오는 시였으나 옮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일부만 올리자니 감동이 나눠질 것 같고, 전부 올리자니 시간이 너무 걸리고,, 그러나 그냥 눈으로 읽고 가슴에만 담고 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지르자. 늦기 전에 늙기 전에,, 감동을 유지하는 인내심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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