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다행이다 비극이다 - 유병록

다행이다 비극이다 - 유병록 일어나고 싶지 않아 다시 눈 감고 싶어 울고 싶어 마음껏 소리칠래 아침부터 취해버릴래 다 그만두고 싶은데 일어나서 세수를 하지 아침 먹고 가방 들고 출근을 하지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지 점심도 먹고 담배도 피우지 나를 일이켜 세우는 건 그저 습관 배고픔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 월급날 슬픔은 얼마나 무력한지 나를 살아가게 하는 그저 그런 것들 쓸쓸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인데 내 집이 있으면 좋겠어 기왕이면 넓고 깨끗하면 좋겠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월급이 좀더 오르면 좋겠어 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어 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어 그럴 듯한 새 시집을 내고 싶어 보잘것없는 욕망의 힘으로 나는 살아가지 얼마나 다행하고 다행한 비극인지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장담은 ..

한줄 詩 2020.11.20

시간의 골계 - 서상만

시간의 골계 - 서상만 오늘은 또 몇 개의 세포가 죽었을까 몸이 나른한 날은 청진기가 없어도 세포가 파삭파삭 죽어가는 걸 느낀다 가끔 아령을 들고 근력을 보태면 가뜩이 마른 마들가리 나이 타령 하며 싱겁게 난다 긴다 해쌓지만 때 되면 그 다 녹초 될 것 뻔하니 삭아도 잘 삭아 진국 소리 듣거나 저 겨울나무처럼 영혼에 몸 맡기고 한량으로 놀다 가면 그 또한 어떠리 한 오백 년 살듯 죽기 살기 서성대도 하루아침 뜻밖 이승도 여기까지라면 공산에 달 뜬들 뭣 하나 *시집/ 월계동 풀/ 책만드는집 하직(下直) - 서상만 -나에게 죽음이야 지척에 와있는 줄 없는 후생이니 직행하든지 유성우(流星雨) 지는 밤 차라리 생혼화석으로 남든지 인적 뜸한 공터에 하얗게 개망초로 몰래 피든지 그도 저도 아닌 먼먼 나라 패왕에 불..

한줄 詩 2020.11.20

십일월 - 전윤호

십일월 - 전윤호 내가 아는 사람은 모두 떠났다 아무도 모르는 거리에서 허공을 과적한 트럭처럼 휘청거려도 밥집들은 제 시간에 문을 닫고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다 눈물로 모인 호수는 망자들의 집 놀라게 할 가치도 없는 사내 하나쯤 제방에 앉아 노래하면 어떠리 음정도 안 맞는 돌팔매로 제 얼굴을 맞추면 또 어떠리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맨 끝자리에 혼자 앉은 조문객으로 이 가을이 또 저무는 것을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OST - 전윤호 남의 이야기에 묻히고 싶어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에 대충 나오고 싶어 어차피 주인공이 아니니 인상적인 부분도 없고 슬픈 죽음도 없겠지 그래도 노래는 청승맞게 부를래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하는 빠른 박자는 취향이 아니야 댐이 막은 강처럼 느리게 ..

한줄 詩 2020.11.20

발목 - 조우연

발목 - 조우연 오거리 횡단보도 옆에서 밥상장수가 밥상을 팔고 있다 개다리소반부터 교자상, 고족상, 두리반까지 짧고 굵은 상다리부터 길고 매끈한 상다리가 가로수 아래 꼿꼿이 중심을 잡고 섰다 식탁에게 쫓겨나 길거리에 나앉은 발목들 어둑한 저녁 밥상 자근자근 말대가리가 물이 오르면 어김없이 밥상부터 날아갔던 가난한 시절 찰과상으로 버틴 뚝뚝한 밥상 발목을 닦아 세우며 눈물 흥건한 소반다듬이를 하던 어머니들 가슴속 벌레 먹은 콩을 밤새 골라냈는지 모른다 요기 때가 되면 접었던 발목을 차례로 잡아 펴고 밥그릇 대신 책을 펴고 앉던 발목들은 밥상머리들이 비대해져 예의 겸양해지던 때가 있었다 화롯불 같던 둥근 온기가 사라진 식탁 아래 발목은 굽힐 줄 모르는 버릇의 부재 바닥으로부터 가깝고도 낮은 소반 한상 차림 ..

한줄 詩 2020.11.16

정미소의 화평 한 그릇 - 고재종

정미소의 화평 한 그릇 - 고재종 양철지붕 벌겋게 녹슨 늦가을의 정미소엔 아직도 얼기미에서 유리알 쌀이 무척 쏟아질까 아무려나 곤고의 일에서 좀 놓여나면 노란 왕겨가 마굿간으로 수북수북 쌓이던 정미소 그 향기 속에 좀 들러 불까, 몰래 뒷짐 지고 들러 신신한 쌀 냄새에 흠흠거리며 쌀 한입 탁 털어 넣고 씹다 보면 고소한 쌀즙이 이내 입안에 가득하겠지 그러면 참새 떼도 아니 들르고는 못 배겨서 이따금 주인이 훠이, 하고 내질러도 아예 천국의 맛을 쪼는 데 열심일 거야 마을과 저만치 떨어져 있어도 통통통통 울려 대는 발동기 소리가 마을과 들길을 단박에 장악해 버리던 늦가을 정미소, 아무려나 왕겨며 쌀가마가 산처림 실리면 히잉, 말조차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말 달구지는 마을 집집으로 내달릴 걸 그러면 겨우내..

한줄 詩 2020.11.16

필름 속에 빛이 흐르게 두는 건 누구의 짓일까 - 강혜빈

필름 속에 빛이 흐르게 두는 건 누구의 짓일까 - 강혜빈 ​ 눈 없는 인형을 줍는다 맨발로 암실 속을 걸으면 발끝에 치이는 머리들 부드럽고 차갑다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는 일 없이 누가 먼저 죽을까 봐 걱정할 일도 없이 마주 앉아 찬밥을 퍼먹는 저녁 완전해지려고 스스로 손목을 깨무는 노을처럼 몸보다 먼저 말을 밀어내려는 식탁에서 너는 가끔 사람처럼 군다 내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는 동안 표정 없음에 대해 배 속에서 자라는 소음들에 대해 하고 싶음에 대해 납작한 비둘기를 쪼아 먹는 빵 조각들에 대해 내가 기어코 벤치의 두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죽은 줄 모르는 것들이 생각을 가지게 되고 잘 울지 않는 게 강한 걸까 물어보면 참을수록 햇빛과 친해질 수 있다고 답하듯이 산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하기 때문에 ..

한줄 詩 2020.11.16

기러기표 - 서정춘

기러기표 - 서정춘 나는 안다 아웃집 옥탑방의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양말 한 짝이 바람 불어 좋은 날 하릴없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누군가가 안쓰러워진 양말짝에 기러기표 부표를 달아주면 구만리장천으로 날려버릴 바람이 불어올 것을 *시집/ 하류/ 도서출판b 11월처럼 - 서정춘 전설 같은 노래라지 딸기 먹고 딸을 낳고 고추 먹고 아들 낳고 희망일기 쓰면서 흥흥거렸지 시간농사 지으며 흥흥거렸지 바야흐로 끝물 전에 도둑맞듯 아들 딸 남의 손에 얹어주었지 돌아와, 아내와 나 의지가지 작대기로 남게 되었지 11월처럼 # 서정춘 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1968년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 , , , 가 있다.

한줄 詩 2020.11.16

서촌(西村)보다 더 서쪽 - 황동규

서촌(西村)보다 더 서쪽 - 황동규 가을이 너무 깊어 갈수록 철 지난 로봇처럼 되는 몸 길이나 잃지 말아야겠다. 길이라니? 버스와 전철 번갈아 타고 걸어 서촌보다 더 서쪽 동네 가게에 들러 맥주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인왕산 서편을 달관한 로봇처럼 천천히 걸으리. 빈 나무에 단풍 몇 잎 떨어지지 않고 모여 가르랑대고 있다. '이제 말 같은 건 필요 없다. 가르랑!' 로봇도 소리 물결 일으킨다' '평생 찾아다닌 거기가 결국 여기?' 그래, 내고 싶은 소리 다들 내보게나. 숨 고르려 걸음 늦추자 마침 해 지는 곳을 향해 명상하듯 서 있는 사람 하나 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로봇이군. 방해되지 않을 만큼 거리 두고 나란히 선다. 흰 구름장들 한참 떼 지어 흘러가고 붉은 해가 서편 하늘을 뜬금없이 물들이다 무..

한줄 詩 2020.11.15

무서운 안부 - 이철경

무서운 안부 - 이철경 술 취해 뒷골목 화장실 찾다가 열어젖힌 후미진 주점 소우(少雨) 홀을 지키는 마담은 서너 번 바뀌었지만 젊은 날 손님이 장년의 손님이 되어도 부르던 노래는 여전하다 협소한 주점 안, 대여섯이 다닥다닥 마주 앉아 처음 본 손님들이 노래하다 술잔을 부딪치며 명함을 교환하던 곳 일어서면 부딪힐 것 같은 낮은 천장엔 세계 각국의 지폐가 노랫가락에 춤추던 곳 방음 효과로 토굴같이 허름한 아지트엔 고성도 불편치 않다 청승맞은 노래를 다 같이 따라 부르며 취해 가던 그날들, 불온한 시절에도 하찮은 애인과 간간이 들렀던 소우, 다시 가 보고 싶다던 친구가 세 번째 뇌수술 들어갔다는 소식 후 연락이 끊겼다 주점에 앉아 노래 따라 부르다 세 번째 수술 후 연락이 끊긴 그의 안부가 무섭게 궁금한 밤이..

한줄 詩 2020.11.15

비문증 - 류성훈

비문증 - 류성훈 나는 흙먼지처럼 왔으니 저녁이 혼인비행처럼 능선을 넘는 것을 본다 이불 속에서 평생 나오지 않을 듯 버스를 따라 우리는 동면놀이하러 가자 붉은 구름에 감기는 바람들을 손등으로 짓이기는, 벌써 저무는 눈꺼풀들을 비벼 보면서 바람이 흙먼지를 데려올 때 홍채는 눈을 가누지 못하고 정류소는 늘 성가신 하교를 기다린다 눈부터 저려 오는 저녁들은 앓아야 할 아픔도 주워 들 그리움도 없어 유감인 건 혈압도 간 수치도 아닌 날파리 떼마저 피해 가는 길 아무도 아무에게도 열병이 되지 않는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보이저 1호에게 - 류성훈 물통 속에 밤이 퍼진다 내 붓은 차갑게 씻기고 안부라는 건 대개 꿈풍선일 뿐, 눈부신 우주 방사선 속에서 버릴 꿈이 없어서, 널 닮은 연체동물을 그렸다 저..

한줄 詩 202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