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둘기 일가 - 손택수

마루안 2020. 10. 28. 21:57

 

 

비둘기 일가 - 손택수


건물 외벽을 뚫고 나온 온풍기 연통이
비둘기들의 횃대로 바뀌었다
연통 아래 묵은 신문이 깔려 있다
시어머니 똥수발만 일곱 해를 했는데
비둘기 똥수발까지 한다며
오늘도 신세한탄을 하는 여자
어찌 된 세상인지 비둘기들도 피똥을 싼다고,
아침마다 신문 기저귀를 간다
피똥은 나도 싸봤다
발목을 절룩거리며 길바닥을 쪼는 부리질 따라
날갯죽지 퍼득거려도 봤다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새는 새라고
더 다가오지 말라 퍼들쩍 틈을 벌리고
알량한 한 뼘 틈으로 겨우 나를 달래도 봤다
늙으면 괄약근이 먼저 풀어진단다
너희 아비도 화물을 지고 계단을 오르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있었어
버린 속옷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오던 것 기억나니
가신 아비 생각에 착잡하게 담배를 무는 베란다
어느 횃대 아래 어깨를 비비적거리고 있는 것인가
비둘기 등쌀에 못 살겠다면서도
오늘도 묵묵히 신문을 가는 여자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행복에 대한 저항시 - 손택수


연금을 계산하고 노후를 설계하고 새로 나온 보험을 좇아다니다가
봄날이 다 지나갔다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고 차 한대를 갖고
여행상품을 검색하는 동안

명품을 간파하는 눈이 생겼는데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고
배신 타령을 한다
와인맛 커피맛을 아는 혀
좋은 브랜드 옷의 감촉은 좋아하면서
정작 네 살갗에는 무덤덤

행복해져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주말이면 쇼핑과 외식으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여행을 가도 남는 건 사진밖에 없더라 법석을 떨면서
폭식하듯 사진을 찍는다

뼈 빠지게 사노라 살지 못 했는가
죽는 것은 습관이 아닌데 사는 것은 습관이 되어서
행복이여, 어쩌다 나는 행복에 대한 저항시를 쓴다
행복을 위해서도 저항시를 위해서도 이건 참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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