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새벽 세 시, 나의 바다는 - 윤석산

새벽 세 시, 나의 바다는 - 윤석산 새벽 세 시에 깨어나 잠이 오지 않는다고 무어가 걱정이겠는가. 잠이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뒤척이다가 어질머리로 이제 막 밝은 햇살 퍼져오는 시간쯤 다시 어설픈 잠이 든다고 무어 대수겠는가. 어차피 마땅히 나가야 할 곳도, 보아야 할 일도 없는데 깨어나면 깨어나는 대로, 잠이 들면 잠이 드는 대로 어질머리면 어질머리대로 잠들었다가는 다시 깨어나는 게 이즘의 나의 삶인데 새벽 세 시, 나의 바다는 그만 더 도망도 칠 수 없는 해역에 갇히어, 다만 출렁거리고 있구나. *시집/ 햇살 기지개/ 현대시학사 저녁 9시 무렵의 그 사내 - 윤석산 저녁 9시 무렵 전철 경로석에 앉아 졸고 있는 그 사내 60은 족히 넘었고 그래서 70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나 아직은 가장으로 그..

한줄 詩 2020.10.20

우리의 날갯짓은 정적으로 흔들린다 - 권지영

우리의 날갯짓은 정적으로 흔들린다 - 권지영 눈물 없이 우는 새 한 마리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나는 눈물 없이 우는 법은 익혔으나 하늘을 나는 능력은 아직 없기에 언젠가 새들처럼 하늘을 날게 되면 밀린 대답들들 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간다 마음을 다쳐 말을 잊은 이 시간의 덩어리를 타고 부유한다 새는 날개의 균형과 공기 저항으로 하늘을 난다 바람을 가를 때는 정적을 깨며 산비탈을 가파르게 오르는 기분이다 누군가를 부르며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새 한 마리, 모든 공기를 억누르며 가만히 다정하다 눈물 없이 우는 법을 그때 배웠지 울기 위해서도 균형이 필요해 삶의 중심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게 평형감각을 길러야 해 서투른 나는 이따금 흔들렸지 바람이 거..

한줄 詩 2020.10.20

울음의 탄생 - 박서영

울음의 탄생 - 박서영 나의 눈동자는 색을 바꿀 줄 안다 앵두나무가 보이는 여관집 방문을 열고 앉아 일렁이는 가로등빛 그늘을 본다 하늘이 울음을 얼려 눈을 내리는 밤이다 족발에 소주 한 병 앞에 놓고 슬픔을 애도하는 밤이다 앵두 한 알 매달지 않았는데도 저 나무는 무겁고 힘들어 눈 쌓인 앵두나무 발목이 젖어 축축해 나는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았는데 몸에 울긋불긋 지렁이가 피었다 밖이 어둡지도 않는데 밤이라고 하지 말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생각이 깊어 슬픔이 탯줄처럼 길어지는 사이 순천의 한 여관방에서 분홍색 목젖에 울음이 매달려 흔들린다 한 호흡만 더 건너가자, 생이여 추운 앵두나무를 몸 안에 밀어 넣고 있는 환한 가로등처럼 눈이 녹아내려 드러난 앵두나무 뿌리가 족발처럼 자꾸 보여, 물어..

한줄 詩 2020.10.19

홍역(紅疫) - 이은규

홍역(紅疫) - 이은규 누군가 두고 간 가을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썼다 지운다 무엇이든 늦된 아이 병(病)에는 누구보다 눈이 밝아 눈이 붉어지도록 밝아 왜 병은 저곳이 아닌 이곳에 도착했을까 답이 없는 질문과 질문이 없는 답을 떠올린다 안으로부터 차오르는 열매 나는 병력을 지우고 붉은 몸을 잘 표백시키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절기 혼자 부르는 돌림노래에 공을 들이고 그것만은, 포기하지 않기 위해 손을 모을 뿐 저기 핑그르르 수면을 도는 단풍잎 같은 병을 다르게 앓지 못한 우리들은 왜 약속 없이 나누는 역병처럼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서만 생각했을까 붉어지는 열매 금세 핑 도는 울음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닌 그래서 나는 오..

한줄 詩 2020.10.19

면접의 진화 - 김희준

면접의 진화 - 김희준 시각장애인에게 파란색을 설명해보세요 퇴화된 아가미의 흔적 귓가에 난 작은 구멍은 무슨 용도일까 궁금했다 물속에서 숨쉬는 방법을 찾아낸 게 갈릴레이였나 다윈이었나 낡은 금서의 한 페이지를 찢는 지난 꿈에 죽은 해안가를 걸었다 선천성 이루공은 태아 시절 귓바퀴와 안면 일부가 떨어지면서 생긴 기형 아니었나요? 네, 아닙니다 인류의 조상이 물고기라는 증거라고 모래사장에 널려 있던 건 해파리의 피부 조직이었다 표정을 읽을 수 있어서 뒤집지 않기로 했다 저는 왼쪽에 있습니다 손을 폈다 물갈퀴를 잡았다 신체 구조가 무악어류와 닮았다 셔츠 안에 지느러미를 숨기고 사는 거 다 알아 해부 구조를 들킬까봐 옷을 입는 거잖아 모계에서 이어지는 유전자를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물비린내 풍기는 손목의 혈관은..

한줄 詩 2020.10.19

문득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 박병란

문득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 박병란 종일 비추어도 애쓰지 않는 것이 귀를 파다 발톱을 깎다 흰머리도 쏙쏙 뽑아주다가 문득, 총채로 먼지를 털면 총채마저 빛이 되어 누구나 드나들어 그만 또 다른 누구나가 되어 너를 벗어난 건 보이저1호가 유일한 물체지 아마, 달마시안 얼룩무늬처럼 지구도 창백한 몽고반점인지 물어봐줄래 최근 근황을 가장 잘 안다고 하니 햇살마켓 같은 그곳에는 다이소처럼 없는 게 없어서 탐사가 시작되면 멀미가 날 거야 하행곡선을 그리다 삶이라는 벙커에 처박히고 볼품없는 가정사는 때때로 병이 들고 우리가 한꺼번에 삼인칭이 되어 밖으로 튕겨 나갈 때 우주를 떠돌다 외계생명체를 만나면 안녕하세요 인사말은 보이저1호가 장착해갔다고 들었어 머지않아 우리는 어쩜 말을 잃게 될지도 몰라 ..

한줄 詩 2020.10.18

벤치의 자세 - 정병근

벤치의 자세 - 정병근 앉아서 자는 것은 조는 것이다 잠깐 졸아서 미안한 자세로 누기 지적하면 언제든지 일어날 태세로 잠 아닌 잠을 깜박 조는 척 다리를 쭉 뻗는 것은 벤치에게 미안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상습적이다 눕는다면 뭔가 위반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누가 봐도 잠깐 쉬는 태도로 얼마든지 깰 준비로 비스듬히 벤치와 하나가 되는 것 잠과 휴식의 경계가 모호한 그 지점 벤치는 그런 것이지 소파도 아니고 마루나 침대도 아니니까 가령, 이발과 면도의 범위라든가 애정과 추행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 벤치가 있다는 것 상념이 많아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살짝 들키는 그런 정도여야지 드러누워 잔다면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 앉는 것과 눕는 것은 천지 차이 드러눕다 드러내다 드르렁거리다 같은 말은 얼..

한줄 詩 2020.10.18

삶의 동질성에 대하여 - 정충화

삶의 동질성에 대하여 - 정충화 남산 어린이회관 근처에 사는 비둘기들은 부잣집 도련님 때깔이 난다 알록달록 치장된 공동주택 테라스에 위엄 있게 앉아 아이들 손에 들린 과자 조각을 지그시 탐하는 여유로움이 있다 우정국로 길바닥을 배회하는 바둘기들은 땟국이 줄줄 흐르는 구걸하는 아이 행색이다 행인들의 발길을 피해 가며 아스팔트의 모래를 쪼아대거나 쓰레기 봉지를 헤집는 생의 고단함이 찌들어 있다 사람 곁에 살다보니 저들에게도 부유층이 있고 하층민이 있다 *시집/ 봄 봐라, 봄/ 달아실 지하 여인숙 - 정충화 서울역 지하도는 해질 무렵 빗장을 풀고 여인숙이 된다 거리에 어둠이 들면 길바닥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제 몸 누일 만큼의 쪽방을 얻어 하룻밤을 난다 별빛 한 올 스미지 않는 냉골 바닥 그들 사이..

한줄 詩 2020.10.18

유행병 같은 것들 - 강민영

유행병 같은 것들 - 강민영 머리통을 흔드는 매미 울음보다 더한 갈망은 빈 껍질이 되기까지 밤에도 신열처럼 떠오른다 밤을 새우며 커튼만큼 주름지던 그녀는 얼굴에 꽃 하나를 얹기로 했다 압구정동에서 바느질이 제일 좋다는 남자는 얼굴에 함부로 선을 긋는다 어느 꽃으로 할까요 그녀는 난이도가 가장 높은 호접난을 가리켰다 뽕브라를 한 여자가 대기실에 앉아 풍성한 열매를 고른다 열매를 버린 은행나무는 바람에 말라가고 젖줄을 놓친 은행이 퀴퀴한 비명으로 땅을 뒹군다 가볍게 날리는 몸통들 소문은 압구정동을 돌며 진화하고 향 없는 난들이 위태롭게 태어나고 더러는 소멸한다 유튜브에서 의사가 예언한다 향후 10년이 지나면 이 거리엔 판박이 괴물들이 떠돌게 될 겁니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한줄 詩 2020.10.17

서러운 개화 - 김윤배

서러운 개화 - 김윤배 쑥부쟁이 꽃봉오리가 이슬을 턴다 혹독한 가뭄을 건너온 불굴이다 꽃대 밀어올리는 쑥부쟁이가 눈물겨워 무릎 꺾어 꽃망울 보았다 빈약한 꽃대로 푸른 하늘 조심스럽게 흔드는 쑥부쟁이 감싸안고 볼을 부볐다 기다려 꽃 필 날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조함으로, 오지 않는 꽃 필 날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무기수의 발소리를 꽃잎마다 숨기느라 늦어지는 쑥부쟁이 그 서러운 개화를 기다려야 하는 막막하고 막막한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구절의 눈빛 - 김윤배 * 구절초는 매일 떠났다 망월동이나 팽목의 해안에서 보라색 꽃잎을 펼쳐 푸른 멍을 가리고 있을 것이다 시월 깊어지면 구절초는 더 멀리 떠나고 싶어 입술을 물 것이다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구절초, 보랏빛 꽃잎의 정절을 역성이..

한줄 詩 2020.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