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돌이킬 수 없는 - 윤의섭

돌이킬 수 없는 - 윤의섭 ​ 예문이지 아주 평범한 성장기를 거쳤다는 것부터 단칸방을 전전했다는 것 영화를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고 한때 성냥갑과 레코드를 수집했다는 정도 지독히 가난했고 잠깐 풍요로웠고 웃으며 슬펐고 슬퍼하며 슬펐고 보이지 않아 미칠 뻔했고 미칠 것 같아 찾아 헤맸고 오늘은 끝장을 내고 말겠다 오늘은 못 하겠다 다짐하다 미루다 여기에 이른 빈약한 연혁 위는 누군가의 인생을 축약해 놓은 글이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 올바로 고치시오 예시일 뿐이지 별로 어렵지 않은 자막처럼 단풍 진다 자막처럼 달이 뜬다 꽤 오랫동안 낯선 풍경의 길 위에 서 있다는 생각 무수한 언덕을 넘어왔으나 그것은 누군가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생각 마지막 언덕은 내 무덤이길 가녀린 들꽃과 마주쳤지만 인사를 나눈 것도 같아 너..

한줄 詩 2020.10.27

접속사 - 정진혁

접속사 - 정진혁 그리고를 손에 들고 조금 울었다 눈 코 입을 기억하는 일은 슬펐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보다 더 질긴 접속사를 남기고 갔다 도처에 상처는 늘어나고 그 흉터마다 접속사 하나씩 자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가난은 적절한 접속이었고 그러므로 가난은 간절한 접속이었다 왜냐하면 덮고 잠을 청했다 어떤 밤도 오지 않았다 상처는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 그러므로 늘 우리 곁에서 영역을 넓혔다 미루나무 끝까지 접속을 밀어 올리기도 하고 고양이의 눈 속에서 그런데를 찾아내기도 하고 빨랫줄에 더구나를 말리며 변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언저리만 흔들릴 뿐 물려주고 간 것이 접속사인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접속이 안 되는 생 속에서 나는 그러나 추잡한 속셈의 기다림일 뿐이고 그래서 알아야 할 것보다 좀 더 많..

한줄 詩 2020.10.27

무연(無緣)사회 - 배정숙

무연(無緣)사회 - 배정숙 손전등만한 빛이면 족합니다 무릎 밑으로 찬바람이 스미는 날 함께 늙은 누렁이가 한발 앞서 불안 쪽으로 다가갑니다 오로지 누렁이 외에 누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녹내장 때문이라 믿습니다 두 눈에서 주르르 흐르는 외로움은 녹내장이 악화되어서라고 믿습니다 한 달에 스무날은 병원 대기실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나무 밑 빈 의자에 앉아 북망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로 보냅니다 봄은 키우지 않아도 잘 자라고 여름은 돌보지 않아도 씩씩하여서 가을은 스스로 성숙했습니다 하지만 겨울과의 경계가 젊음보다 훨씬 두텁다는 것을 터득하는데 생의 대부분을 써버렸습니다 비로소 슬하가 허전합니다 그냥 막막하게 밤을 끌어당겨 눕습니다 다시 새벽과 마주할지에 대해서 마음 쓰지 않기로 한 뒤부터 아랫목에다 울음..

한줄 詩 2020.10.27

현금 인출기 - 전영관

현금 인출기 - 전영관 판로도 막힌 희망 따위를 양식해보다가 하늘로 방생해버린다 천국의 문 앞에 모여 있겠지만 희망과 가능성은 좌우가 같은 슬리퍼 변기로 걸음을 뗄 때에나 신는 것 하루는 예후도 나쁜 질병 양쪽으로 빤하게 분리될 것 같은 절취선을 따라가는 느낌으로 시계를 본다 불안에 대한 저작권은 없지만 해적판처럼 남용되는 것들이라서 몰수하고 싶다 불면 불운 불쾌 등 돌림자 형제들의 판촉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수면으로 올라와 숨쉬는 고래가 된 것 같다 숨을 오래 참는다면 그리운 사람이 없다는 증거다 부르튼 입술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주둥이가 헐어버린 횟집 수족관 우럭을 떠올렸다 최선을 다해 절망했겠지 다시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먹구름이나 치워주는 일을 하고 싶다 책임지는 것 외엔 무능한 가..

한줄 詩 2020.10.23

몽골에서 쓰는 편지 - 안상학

몽골에서 쓰는 편지 - 안상학 독수리가 살 수 있는 곳에 독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살 수 있는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꾸만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당신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고 나도 자꾸만 나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당신에게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자꾸만 마음이 좋아지는 나에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시집/ 남아 있는 날들..

한줄 詩 2020.10.23

낡은 신발 - 심종록

낡은 신발 - 심종록 신발을 잃어버렸다 백감독도 만나고 인디안 수니도 만나고 반가운 사람 손도 잡아 흔들고 초면인 사람과 통성명도 하고 삶과 죽음이 뒤섞인 자리 밤늦은 시간이지만 돌아가야 하는 처지라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잔 마다하며 입술이나 축이다가 자정 근처에서 일어섰는데 신발이 없다 다리 아래 좁은 구멍에서 빠져나와 첫 발 떼기 시작할 때부터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던 지금은 몇 번째인지 톺아볼 순 없지만 여기까지 나와 동행한 신발이여 나의 분신이여 사제를 함께 하자던 도반이여 때로 똥 밟은 자존심의 더러운 위안이여 네가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어느 쓸쓸한 날 세상과 하직하기 위해 백척간두에 올라서는 사람도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후 한쪽 발부터 내민다는데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열에 아홉은..

한줄 詩 2020.10.22

이별의 서 - 허연

이별의 서 - 허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 아니면 먼지가 되어버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지 사실 이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 한 시절 자주 웃었고 가끔 강변에 앉아 있었다는 것뿐 그사이 파산과 횡재와 저주와 찬사 같은 게 왔다 갔고 만국기처럼 별의별 일들이 펄럭였지만 우리는 그저 자주 웃었고 아주 가끔 절규했지 철로가 있었고 노란 루드베키아가 있었고 발가락이 뭉개진 비둘기들이 있었고 가끔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많았지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이었지 내일을 몰랐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단어도 모두 부정확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 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우리의 한숨이 ..

한줄 詩 2020.10.22

녹내장 - 김보일

녹내장 - 김보일 공덕동 서울안과에서 안구단층촬영을 했다 쌍계사 잎자루에서 천왕봉 꼭대기까지 뻗어나간 지리산 잎맥처럼 망막에서 뇌로 가는 시신경이 필름 속에 뻗어 있었다 내 몸은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거느리고 있는지 스무 살의 처녀가 女子라는 이름으로 내 심장으로 온 것도 그 길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한 女子의 나라에서 한 사내의 심장까지를 잇는 길가에서 검둥개가 짖고 복사꽃이 흔들리고 달빛은 천축의 불빛처럼 들썩였을 것이다 시신경이 차츰 사라지는 것이 녹내장이라며 의사는 안압을 낮추는 약을 내게 처방해 주었다 나는 필름 속에 사라져 가는 모래의 길들을 보며 그 길로 흘러들어 왔을 산초나무, 층층나무, 노간주나무 꽃나무들의 이름과 그 길로 흘러들어 왔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왼쪽 ..

한줄 詩 2020.10.21

바람의 무덤 - 서상만

바람의 무덤 - 서상만 어디가 더 다정한 무풍지대일지 알 수 없지만 구름처럼 어리둥절 떠돌아도 이 세상은 참 행복했다 하기야, 갈 때는 또 다른 바람 따라갈 것 뻔하지만 어쩌랴 이 세상 저 세상이 다 바람의 무덤인걸 바람의 속내를 나무랄 수야 봄바람이 불거나 낙엽이 지거나 눈보라 쳐도 눈물 없이 꿈꿀 수 없는 무명 거기 심산 독채에 오래오래 소경처럼 살아도 좋으련만 *시집/ 월계동 풀/ 책만드는집 말인즉 - 서상만 그래서 말인즉 나, 맨주먹이라도 차라리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새까만 세 살짜리 알몸뚱이로 그러나 내가 꼭 빗나간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치 않네 목숨 내놓고 버텨온 삶이지만 때 되면, 가지 말라 붙들어도 나는 떠나야 하리 오랜 날, 나를 길들인 그 바람이 어느 날 사정없이 나를 내동댕이칠 것이므로..

한줄 詩 2020.10.21

햇살 속의 슬픔 - 이봉환

햇살 속의 슬픔 - 이봉환 햇살 속에는 제 몸빛과는 다른 것들이 숨어서 있지 그것들 투명한 파장으로 둔갑하여서 우리 눈에는 그저 안 보이기 십상 깊어진 가을 쓸쓸함이 한이 없거나 맑아지고 맑아진 몸 빛깔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깜빡 그 존재를 드러내고는 하는 모양 그러고도 그 느낌이란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촉수를 바들바들 떨어야 어신처럼 톡, 톡, 그렇게 전해온다는데 때마침 '글루미 선데이'를 듣는다 지금 나 그걸 타고 당신에게로 갈까 해의 살을 타고 몰래몰래 투명함으로 그대에게 퍼져갈까 이 울림이 가을을 견디는 나의 힘이다 *시집/ 응강/ 반걸음 잠자리 생각 - 이봉환 나는 저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전히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저들도 분명 제 안에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

한줄 詩 2020.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