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막창집 - 김륭

막창집 - 김륭 영원, 이라는 말을 구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팔라진 숨들이 장례식장 화환처럼 묶인 곳, 내가 웃으면 바람이 따라 얼굴을 질겅거리며 들어설 것 같은, 여기서는 밤도 문상객이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자연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어서 울음마저 질겨서 한 번 더 영원이 시작되는 곳. 여기는 소를 위한 모든 나라, 우리는 풀처럼 순하게 앉아 있고 코뚜레를 꿰기도 전에 달아난 사랑 또한 어느 구석진 자리에서 꼬깃꼬깃 입을 봉한 봉투를 들고 사람을 줍고 있는, 언제나 막다른 곳이다. 인생이란 입으로 뱉기 전에 뒤를 들키는 말이어서 웃는다. 빌어먹을, 다음 생이 있다면 이번 생은 살지도 않았을 것! 소가 웃는다. 발밑에 떨어진 숨을 동전처럼 주워 다시 핥는다. 그게 다 영원이란 말 때문에 그래. 소..

한줄 詩 2022.07.26

그 흔한 연고도 없이 - 이명선

그 흔한 연고도 없이 - 이명선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나의 이야기로 나는 흥건한 바닥이 되었다 고시를 치를 생각 없이 고시원에 있었다 공직자처럼 공개할 재산이나 공제할 가족이 있었다면 고사했을 것이다 열대야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물수건을 올리고 느린 밤을 밝히듯 삶의 낱장을 뜯으며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면 엎드려 자다 목마른 얼굴로 일어났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언뜻 마주칠 수만 있었다면 흥건한 바닥에 배설된 우리가 떠다닌다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듣는 우리의 이야기는 작은 소란에도 불시에 솟구치려는 간헐천 같았다 두 평 남짓한 방에서 우리의 회고록을 쓴다면 공수래공수거라고 써야 할까 공공의 적이라 써야 할까 검은 마스크로 가린 칸칸의 방은 타 버린 낱..

한줄 詩 2022.07.23

종달새 - 이정록

종달새 - 이정록 ​ 엄니, 벌써 와서 죄송해요. 수업 중에 집에 오던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나. 하여튼 애썼다. 도망친 건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어요. 근데 저만 몇겹이나 잔디 이불을 덮었네요. 뼈마디만 남아서 어미는 평토장도 무겁단다. 고단할 텐데 며칠 푹 자거라. 억하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천천히 평생토록 얘길 나누자꾸나. 엄니도 좋은 꿈 꾸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아무 말씀 안 하신데요? 녹아버린 애간장과 울화통이 또 터진 게지. 곧 뼈마디 추려서 일어나실 거다. 아버지가 칠성판을 발로 차도 죽은 척 누워 있거라. 꽃 필 때 보자. 아버지도 봄에는 종달새처럼 말이 많아진단다.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첨작 - 이정록 달밤에 지방을 태우고 엄니와 마루에 걸터앉아 뽕짝..

한줄 詩 2022.07.23

왼쪽 곁에 내가 왔습니다 - 김재덕

왼쪽 곁에 내가 왔습니다 - 김재덕 봄날 국수 한 그릇 먹고 굽은 느티 어깨 드리운 평상에 앉습니다. 꽃잎 몇 닢 날립니다. 담배 한 모금 낯선 손님처럼 사라지는데 왼쪽 곁에 누가 앉습니다. 어느 봄날 꽃비 내리던 서소문공원에서 세월 참 더럽게 안 간다 먼지 뽀얀 질경이한테 분풀이하던 젊은이군요. 발밑에는 그날 곁에 있었던 그녀 눈물 한 방울 제비꽃으로 피어 있는데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젊은이 날 두고 포로롱 혼자 날아갑니다. *시집/ 나는 왼쪽에서 비롯되었다/ 곰곰나루 개심사(開心寺) - 김재덕 서산 지나 해미 가는 길 늙은 작부 사타구니 같은 민둥산 헤집고 들어가면 가슴 환한 절집 하나, 개심사 있습니다. 키 큰 소나무들 내려다보는 검버섯 돌이끼 계단 오르다 보면 문득 내려다보는 천 년 기억..

한줄 詩 2022.07.22

줄넘기 - 조숙

줄넘기 - 조숙 그동안 만났던 줄을 넘는다 줄을 보고 따라갔다가 낯선 입구 앞에 덩그러니 남겨지던 경계를 두 손으로 잡고 넘는다 뒤통수를 맞거나 발목이 걸려 넘어져도 무릎 굽히며 줄을 넘는다 굽힐수록 다치지 않는다는 것 날지도 못하는 두 팔 날개인 듯 믿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시간은 가고 그렇게 삶의 근육이 커질 것이라고 믿으며 줄을 돌린다 바닥을 쳐봐야 살길이 보인다는 오래된 전설 줄을 만날 때마다 바닥을 딛고 날아올라야 하는 고단한 연속 줄넘기 어두워진 미끄럼틀 아래에서 줄넘기를 한다 *시집/ 문어의 사생활/ 연두출판사 흘수 - 조숙 내가 타고 가야할 미래는 올라타면 움찔한다 작은 바람에도 좌우로 흔들린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두려움, 가끔씩 튀어 오르는 호기심으로 마음 두근거리고, 멀리 지나가는 물결..

한줄 詩 2022.07.22

슬픔을 부르는 저녁 - 문신

슬픔을 부르는 저녁 - 문신 오늘 저녁은 낡은 상자를 내려놓듯, 다만 다소곳한 노래가 되어 세상에 주저앉는다 상자는 유월의 평상에 나앉은 사람처럼 선과 면의 각오로 저녁에 기대었고 건너편에서 까닭 모를 아픔처럼 어린 사과나무의 그늘이 침침해져 간다 그러니 상자에는 상자의 내력이 어둠에는 어둠의 내력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말해 줄 수 있을까? 슬픔에는 슬픔의 내력이 있다는 말을 누가 이 저녁, 캄캄해져 오는 바람의 찬란한 침묵처럼 노래할 수 있을까? 먼바다에서 저녁을 맞이하는 일처럼 우리의 상자는 그렇게 낡아 간다 바다라니 ...... 노래의 침묵처럼, 그 침묵에 벗어 놓은 신발처럼, 저녁이 가지런하게 건너올 때 그 주춤거리는 걸음을 마중하는 처마 끝 흐린 등불 같은 심정으로 캄캄한 슬픔이라고, 손에 닿는..

한줄 詩 2022.07.21

근본 없다는 말 - 김명기

근본 없다는 말 - 김명기 마당가 배롱나무 두 그루에 꽃이 한창이다 한 그루는 장날 뿌리째 사다 심었고 한 뼘쯤 더 자란 나무는 가지를 베어 꺾꽂이했다 뿌리째 심은 나무는 사방 고르게 가지를 뻗어 꽃 피우고 베어 심은 것은 뿌리내리며 가지를 뻗느라 멋대로 웃자랐다 그중 제일 먼저 뻗은 가지는 땅을 향해 자란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을힘 다해 살았겠지 기댈 데가 없다는 건 외롭고 위태롭다 죽을 수가 없어 죽을힘 다하는 생 뿌리가 얼마나 궁금했으면 아직도 땅을 향해 자라날까 무심코 내뱉는 근본 없다는 말에는 있는 힘 다해 뿌리내리며 허공을 밀어 올리는 수없는 꺾꽂이 같은 삶이 깊숙이 배어 있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닮은 꼴 - 김명기 떼던 화투점 밀치고 잠든 늙은 엄마 발을..

한줄 詩 2022.07.21

가시나무를 씹는 이유 - 김용태

가시나무를 씹는 이유 - 김용태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자식 같은 새파란 것에게 이유 없이 삿대질, 욕을 먹고 치밀어 오르는 분에 어디 밥 빌어 먹을 데가 여기 뿐이겠냐고 호기롭게 사표를 내던지고 나오자 최씨, 쓴 커피를 타 건네며 어지간하면 참고 견디어 보라면서 의자를 내민다 주저앉은 경비실 한쪽 화면 속에는, 낙타 한 마리 말라비틀어진 다리 사이에 불어 터진 젖통을 매달고 억센 가시나무를 씹고 있는 중이다 스스로 낸 상처에서 비어져 나오는 뜨거운 것을 목구멍 뒤로 넘기는 것이라고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아 죄 없는 짐승의 선한 눈이라니 그러다 문득, 사막 저편에서 굶주려 애타게 어미를 기다리고 있을, 날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돌이 떠올라 접시꽃 피어 환한 관리소 쪽으로, 자꾸 자꾸만 눈이 가는..

한줄 詩 2022.07.20

그림자 무사 - 조온윤

그림자 무사 - 조온윤 나를 대신해서 명랑하게 살아줄 그림자를 찾습니다 나에게는 실체랄 게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거든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주어서 나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내일의 일들 따위 잊어버리고 내일모레의 일들 따위 전부 잊어버리고 그림자는 나를 대신해서 친구들을 만나 하하호호 농담을 주고받았다 주말에는 낯선 애인과 영화도 봐주었다 되풀이되는 말싸움도 대신 해주고 사랑이고자 하는 게 곧 사랑이라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격렬하게 살아주었다 모든 게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았던 거 같지만 그림자야 진심이고자 하는 게 곧 진심일 수 있다면 가짜였던 마음은 언젠가 펄떡이는 심장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거기에 없어도 밤이면 거리는 어두컴컴해지고 가로등엔 불이 켜진다는 걸 안..

한줄 詩 2022.07.20

불모에서 별을 보며 울다 - 류흔

불모에서 별을 보며 울다 - 류흔 잊지 못하는 것은 잊을 수 없다 잊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이 처음에서 시작되듯 마지막 순간에 처음이 들어왔다 시간은 가로 건너는 풍경, 심장을 누르는 가벼운 공기들 중력이 없으니 수심(愁心)도 없으리 옆으로 깊어지는 숲으로 황혼이 안개처럼 깔릴 때 처음으로 마지막이 시작되었네 이런 벌판에 별은 곤란하므로 별이 박이기 전에 분위기를 사수(死守)해야 해 오늘은 어둠이 있었고 별이 떴다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눈물이 흘렀지만 별에게 쏘아 올릴 총신(銃身) 한 그루 없는 불모지에서 나는 그만 중력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총체적 슬픔 - 류흔 이 밤에 무얼 생각해야 했을까 달이 게워논 따뜻한 토사(吐瀉)를 밟으며 ..

한줄 詩 202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