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림자 무사 - 조온윤

마루안 2022. 7. 20. 21:57

 

 

그림자 무사 - 조온윤

 

 

나를 대신해서 명랑하게 살아줄

그림자를 찾습니다

나에게는 실체랄 게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거든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주어서

나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내일의 일들 따위 잊어버리고

내일모레의 일들 따위 전부 잊어버리고

 

그림자는 나를 대신해서 친구들을 만나 하하호호

농담을 주고받았다

주말에는 낯선 애인과 영화도 봐주었다

되풀이되는 말싸움도 대신 해주고

사랑이고자 하는 게 곧 사랑이라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격렬하게 살아주었다

 

모든 게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았던 거 같지만

 

그림자야

진심이고자 하는 게 곧 진심일 수 있다면

가짜였던  마음은 언젠가 펄떡이는 심장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거기에 없어도

밤이면 거리는 어두컴컴해지고

가로등엔 불이 켜진다는 걸 안다

아, 실재하는 세계를 걷고 싶다

 

네가 거기 있다는 걸 안다

따라오지 말고 나란히 걷자고 말한다

 

 

*시집/ 햇볕 쬐기/ 창비

 

 

 

 

 

 

먼 곳  - 조온윤


갈 수 없는 곳으로는 다만 편지를 쓰네

극락에 살고 있는 새들은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건 극락엘 다녀온 사람이 알려준 걸까
너무 믿고 싶은 소문은 의심부터 들지

평일 오전이라서 거리가 텅 비어 있다
길바닥에 앉아 옥수수를 팔던 할머니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먼 곳에다 묻는 안부를 싣고 비행기는 날아가고
공중에서 쏟아지는 우편처럼
전단지들 휘날리고
지상낙원 최대 규모 오픈 이곳에서 행복을 찾으세요, 그런 말들을
함부로 믿고 떠나버리네

세상의 끝에는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는 뒷문이 있는지
문지방을 넘어 발을 딛는 순간 문은 어느 쪽에서
닫히고 더는 열리지 않는지

사람들은 수평선을 향해 끊임없이 새를 날리지만
정작 그곳에서는 향기조차 실려 오지 않네

수상한 일이지
수평선 너머로 한번 날아간 새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그리워하지도 않는다는 건

그만큼
그곳은 아름다운지

 

 

 

 

# 조온윤 시인은 광주 출생으로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햇볕 쬐기>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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