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티눈이 자란다 - 양아정

티눈이 자란다 - 양아정 어떤 사람에겐 터널이 누군가에겐 지름길이다. 계단이 납작 엎드려 공황장애를 앓고 바람은 계단의 꼭대기에서 춤춘다. 먹구름을 배달한 까치들 조명 꺼진 터널을 지나가는데 셔터를 내린 그의 눈은 아직 겨울이다. 아무도 그의 벨을 누르지 않아 봄빛은 창을 두드리는데 날 선 불안은 손발을 창밖으로 자꾸 던져버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먼지들의 임대료는 벚나무 옆 싱싱한 포커레인이 독촉한다. 뒷모습뿐인 거울 소파가 침대가 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불황과 공황을 오독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낙서가 이 벽 저 벽 뛰어다닐 때 벚꽃의 공약은 일용직 잡부를 재배할 거라는 촉지도 이건 서막에 불과할지도 아무도 모른다. 흰 달은 셔터를 두드리는데 *시집/ 하이힐을 믿는 순간/ 황금알 나..

한줄 詩 2022.08.01

여름방학 - 박은영

여름방학 - 박은영 어린 새가 전깃줄에 앉아 허공을 주시한다 한참을 골똘하더니 중심을 잃고서 불안한 오늘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나의 비행은 어두운 뒤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뒷산, 농협 창고 뒤, 극장 뒷골목 불을 켜지 않은 뒤편은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뒤보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백열등을 깨고 담배연기 자욱한 친구의 자취방을 박차고 나온 날, 전깃줄에 걸린 별 하나가 등을 쪼아 댔다 숙제 같은 슬픔이 감전된 듯 저릿하게 퍼지는 개학 전날 밤, 밀린 일기보다 갈겨 쓸 날들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새가 날 수 있는 건 날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 속의 무게를 훌훌 털어 버리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게 날갯짓이라면 모든 결심은 비상하다 *시집/ 우리의 피는 ..

한줄 詩 2022.07.30

장소 신파적 - 이용훈

장소 신파적 - 이용훈 산자락 온기 찾아 모여든 집들 벌어진 틈에 풀칠 걱정 잊으려 해도 근심은 달빛 쬐는 산맨치로 그림자 짙게 얼굴들 덮는다 덮는데 뿌리박는 것은 그런 것인가? 돌바위에 난생으로 긁힌 살결 달 참 밝은데 얼룩 한점 없네, 없어서 계단 내려가는 아이 거친 숨에 볼 금세 빨개지고 소학교 기억, 니은, 디귿, 리을, 미음.. 읽고 나면 그만 마쳐도 괜찮다 해서 부둣가 하루떼기 하역으로 막내새끼 시작했네 시키는 거 하라는 거 나서는 거 말리는 거 시린 거 아린 손 마디마다 후— 불년 따끔 찌르던 손은 피딱지 피어나고 지고나면 배 타고 그물 까는 어부도 해보겠다 했지 그래야만 해서 살아나는 것은 물때 맞춰 나가고 오가는 거라 했네 파도에 온몸 얻어터지니 지켜보던 보시더니 남해 바람은 만신창이로 ..

한줄 詩 2022.07.30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 이윤승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 이윤승 머리통이 견고한 못은 노래가 되지 못한 노래를 부르며 단련되었다 꽉 조이며 맞물리던 시간에서 못은 얼마나 단련되며 길들여졌나 흰 벽을 우듬지라 믿으며 걸어놓은 빨간 모자가 열매인 줄 알고 쪼아 먹으며 후렴구가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며 웅덩이 빗물처럼 벽안에 고여 있었다 고여 있는 물이라는 생각을 잊고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경전처럼 명상의 자세로 앉아 있으면 벽이 창공이 될 수 있을까 자목련 서 있는 꽃밭으로 눈길이 간다 나무 어깨에 이마에 박힌 자줏빛 꽃송이들 바람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나무를 빠져나온 꽃잎들 날개를 파닥이며 새처럼 창공으로 날아간다 먼 눈빛으로 사람들이 벽이라 느낄 때 못은 꽃잎처럼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그 너머로 마음껏 날아가고 있는..

한줄 詩 2022.07.29

여기에서 - 황현중

여기에서 - 황현중 너무 멀리 가지 않기로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 오늘을 잊지 않기로 한다 두근두근 오늘을 떠나지만 지친 발걸음이 쉴 곳은 애오라리 여기뿐 작은 죄가 늙은 어미의 품에 안기고 열두 줄 가야금의 현을 누르듯 슬픈 사람들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여기에서 하루의 후회를 정갈하게 다듬어 일기장 안에 눌러 쓰고 떠오르는 눈썹달 바라보면 저절로 솟는 쓸쓸한 미소 같은 오늘을 가득 사랑한다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까지 나를 생각하고 너를 그리워한다 세상 안에 온몸 부린다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길바닥 - 황현중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날마다 흔들리는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이 길바닥이 길바닥 모퉁이에 핀 개불알꽃이 예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옆구리에 ..

한줄 詩 2022.07.29

감나무 아래에서 - 김애리샤

감나무 아래에서 - 김애리샤 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르르 생겨난 감들 그중 작고 못난 감들을 밀어내는 나무 떨어진 감들은 감나무 아래 풀섶 어딘가에 떫은 피로 스스로의 상처를 덮는다 아홉 살 애란이가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 감나무 아래로 달려가는 일 이슬에 발이 다 젖도록 상처난 감들을 줍는 일 풋감 몇 알 주워 쌀독에 묻어 두면 상처에 새살 돋듯 주홍색으로 예쁘게 익어 가던 감 빨리 예뻐지라고 손가락으로 살살 눌러 보면서 애란이도 말랑말랑 익어 갔다 이파리조차 많이 달지 못하는 늙은 감나무 아래에서 풀섶을 뒤적인다 작은 상처들이 아물어 가며 달콤해진다는 것을 사십 년 전 아이는 알고 있었을까 각자 다른 곳에서 같은 계절들을 지나온 사이 제가 맺은 열매를 제가 버리며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늙..

한줄 詩 2022.07.28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 - 박판식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 - 박판식 25 곱하기 2에 빼기 2, 어린 아들은 무엇을 계산하는가 검은 장미, 하늘은 후퇴를 거듭하는 중이다 운이 다한 거북이가 바다로 돌아가는 길에 굶주린 자칼을 만난다 스물다섯 나이에 죽은 엄마를 만나러 쉰여덟 나이의 아들이 하늘나라로 가면 아빠 같은 아들과 딸 같은 엄마가 만나겠네 장구벌레들이 눈송이처럼 떠 있는 웅덩이를 엄마 하고 불러본다 나가려고 옷을 차려입었다가 다시 하나씩 벗고 발가숭이가 되어 중환자실의 외삼촌 자세로 누워본다 임신한 아내가 냉면을 찾는다 뱃속의 아이는 실컷 놀았다 제아무리 더하고 빼도 세상의 무게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문학동네 나는 말한다 - 박판식 인생은 발걸음이 빠르다, 화요일에는 엉터리 ..

한줄 詩 2022.07.28

은유로서의 질병 - 이현승

은유로서의 질병 - 이현승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생각해 본 적 있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후회가 없는 사람은 없고 우리는 모두 실패한 적이 있지만, 그래서 실패의 기원으로 가서 기원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터미네이터-T1000의 일이겠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유감스럽게도 액체 금속이나 최첨단 나노 갑주도 없이 기껏 두부처럼 무른 살가죽만 걸치고 태어나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빨거나 쥐는 것, 먹고 싸고 울고 웃는 게 전부일 뿐이며 더욱이 우리에겐 기억이 없을 것이므로 시간을 거슬러, 마땅히 되돌아온 이유를 모르는 우주 전사의 처지란 기실 우주 미아와 같을 것이다. 나는 전생을 믿지 않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이지만 코끝 벌름거리게 하는..

한줄 詩 2022.07.27

반성 - 편무석

반성 - 편무석 가을은 나의 발치 처음 슬픔이란 지병을 얻은 것도 내가 태어난 가을 겁도 없이 덤비다 꺾이고 찍혀 능청스레 붙잡아 둔 삭정이를 온몸에 박힌 옹이를 엄살로 갈고닦은 그늘은 편리하고 따뜻한 병상 몸이 뜨거워 주체하지 못한 나무가 분신(焚身)에 들 때 너무 크게 벌린 나의 입은 가을의 아궁이 울컥울컥 넘치는 핏빛 재를 받는다 흰 눈이 자랄 때까지 제 살 찢어 우는, 하늘에서 내리는 검은 눈에 야위어 가는 흰 바람 *시집/나무의 귓속말이 떨어져 새들의 식사가 되었다/ 걷는사람 간월도 - 편무석 살아내지 못할 것 같던 날들이었지 고비마다 뛰어들던 달빛에 이별을 달려온 길은 기적이었어 건너를 향해 내민 손이 뒤틀린 나무는 오랜 시간 흔들려서야 물결의 상념을 키워 물결을 부르는 마음에 닻을 던진 서해..

한줄 詩 2022.07.27

허물을 통과하는 소란 - 최규환

허물을 통과하는 소란 - 최규환 어둠끼리 살을 맞대고 온전한 무엇에 기댈 때 온기를 품은 매미 소리는 누구의 허물을 받아내는 목청일까 아무도 없고 어느 누구도 있으면 안 되는 새벽 정거장 실개천을 뒷목에 감춘 섬뜰교 너머엔 고요가 남긴 슬픈 뒤태로 서성이다가 오늘에서야 내 눈에 들어찬 풍경을 펼쳐 들었다 팔자에도 없는 몸이 뒤엉켜 목불좌상(木佛挫傷)의 염주를 꿰고 있던 매미는 우는 방향에 맞춰 허물이 깃든 내연의 짝을 이루고 있다 사랑에 실패한 울음이었다가 고비를 넘나드는 밤이 오고 한세상 떠메어 흐르다, 경계를 허물며 읊어대는 경전(經典)을 펼쳐놓은 것인데 슬픔도 한 밑천이라서 몸을 헹구는 적막으로 왔다가 다른 세상을 잇는 들끓는 소리로 죽음도 불사하고 빛나는 저, 바스러지는 소란 *시집/ 설명할 수 ..

한줄 詩 2022.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