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커피 - 박용하

커피 - 박용하 지상에서 마시는 겨울 커피 한 잔 혼자 노는 데 타고난 커피 한 잔 검은 눈물이라고 그랬나 너는 4만 킬로미터를 간다 너를 자주 찾던 그는 비 내리는 가슴을 지닌 길을 아끼던 나무 인간이었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삶이 되살아났다 머나먼 이국에서 온 검은 시간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마시며 슬픔의 바닥에서 젖는 비의 얼굴을 본다 그에겐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때때로 이 비루한 거리에서 한 잔의 커피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저녁을 찌르는 술 한 잔과 지상을 떠나가는 맛으로 담배 한 대를 더하고 싶었을 게다 그는 외롭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마로 만나는 사람이었다 고개 돌리면 얼음 사회가 버티고 서 있었다 삶은 대책이 없었고 죽음은 어찌할 줄 몰랐다 지상에서 마시는..

한줄 詩 2022.08.10

목마름에 두레박 내리는 - 배임호

목마름에 두레박 내리는 - 배임호 젊을 때는 시간이 기어간다고 나이 들면 시간이 날아간다고 이래도 투정 저래도 투정 투정 소리 듣기 싫어 가던 길 멈추고 싶어도 그저 묵음으로 동녘을 바라보고 달리는 것은 그대를 향한 사시사철 목마름 우물 속 두레박을 내리는 사랑 때문 *시집/ 우리는 다정히 무르익어 가겠지/ 꿈공장플러스 온 세상이 내 품에 - 배임호 내가 세상을 미워할수록 세상은 나를 멀리하고 내가 세상을 보듬어 줄수록 세상은 나를 가까이한다 마음 한번 크게 먹고 눈 한번 크게 떠서 말 많고 탈 많은 세상 한번 허리 굽혀 안아주니 온 세상이 내 품에 머무는구나 # 배임호 시인은 1957년 무주에서 태어나 농촌의 정겨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고, 고등학교부터 서울 도심의 역동적인 삶의 현장을 체험하..

한줄 詩 2022.08.09

그때, 오이지 - 박위훈

그때, 오이지 - 박위훈 자귀나무 꽃그늘에서 찍은 가족사진처럼 짜디짠 가난이 서로를 옭아매 두었던 흑백사진이다 골마저 허옇게 낀 독 안의 염천(炎天) 단칸방, 쉰내 나며 부대끼던 내 키만 한 옹기그릇이다 감자며 옥수수 삶아 멍석에 둘러앉았을 때 무짠지와 빠지지 않던 저녁 두레밥상이다 누름돌 괸 오이지 쑤석이며 닳은 손끝으로 간을 보던 쭈글쭈글한 어머니의 아린 손이다 비칠비칠 빈손뿐인 나, 늘 낮은 곳에서 살갑다 꼬리 치며 괴던 댓돌 밑 누렁이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면 하는 여름도 한걸음 쉬어가는 찬밥 한 덩이다 *시집/ 왜 그리운 것들만 더디 바래지는지/ 상상인 허물이라는 허물 - 박위훈 여름의 짧은 문장은 뾰족한 염천을 내딛는 울음의 한때 허공의 우듬지를 흔드는 건 매미 지루한 반복음을 해석해 듣..

한줄 詩 2022.08.08

초원 - 하상만

초원 - 하상만 더 이상 달아나지 않고 토피 무리가 먹혀 가고 있는 동료를 바라보고 있다 하이에나는 검은 주둥이를 깊숙이 집어넣고 먹이를 물어뜯고 있다 토피들은 안다 하이에나가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는 것을 동료가 죽는 동안 안전하다는 것을 얼굴을 든 하이에나가 동료의 얼굴에 범벅이 된 붉은 피들을 혓바닥으로 핥는다 서로를 닦아 주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먹고 있다 토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까 내가 아니니까 오늘도 무사하니까 약자들의 수는 언제나 더 많지만 소수를 이기지 못한다 모여서 달아나기만 한다 모여서 몰아내지 않는다 동료의 마지막 피까지 핥고 있는 하이에나를 보면서 자연스러운 거라고 자연은 변하는 법이 없다고 체념한다 초원의 청소부 독수리가 날아와 남은 음식을 먹는다 *시집/ ..

한줄 詩 2022.08.08

몸, 덧없는 몸 - 홍신선

몸, 덧없는 몸 - 홍신선 인간은 베잠방이 방귀 새듯 가뭇없이 사라지고 뭇 기관 허물어진 짐승인 몸만 그렇게 덧없는 몸만 남았다. 오냐 오오냐 말 안 해도 네 마음 다 안다고 낮은 소리 건네던 향로의 다 탄 무연향(無煙香)이 무시로 떨어져 내리고 밤 이슥해 나와 본 영안실 밖 내 등 뒤 하늘에는 옆구리에 소변 주머니 달고 곡기 끊은 그러나 편안한 얼굴로 잠 깬 구름 하나 떴다. 그 멀지 않은 곳 마침 열여드레여서 누군가 먼 길 채비로 잘 닦아 꺼내 논 신발 한 짝이 유난히 환하다. 그동안 궂은일 다 거두어 간다는 그동안 뭇 인연들 고맙다는 그니가 마지막 머무는 이승.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낮달이 뜨는 방식 - 홍신선 살아서 사람들의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철벙철벙 물탕 튀며 건너뛰었던 ..

한줄 詩 2022.08.03

어느 노인의 예감 - 부정일

어느 노인의 예감 - 부정일 할멈, 당신이 팔순 넘겨 오라는 당부 때문에 빈자리 옆에 누워 자고 일어나기가 지루했는데 팔순은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았는데 할멈 죽고 이 년이던가 하나 남은 막살이를 아들에게 증여할 땐 나, 먼 길 갈 때까지 막살이에서 할멈이 두고 간 것들 만지다가 어느 날 조용히 따라가리라 생각했었네 객지 나간 아들이 살다가 어려워 빌린 빚이 팔아 간 돌랭이로는 모자라 막살이마저 비워줘야 하네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곳이야 이 넓은 세상 밤이슬 피할 문간방쯤은 있겠지만 채권자 양반이 오는 봄까지 기한은 줬으니 할멈, 그나마 올겨울은 걱정이 없네 아들놈이야 다시 일어설 테니 걱정 마오 잘난 자식에게도 어려운 시기는 있는 법 한때는 할멈과 나도 힘든 고비 넘기며 살았잖소 수중에 있는 몇 푼은 ..

한줄 詩 2022.08.03

안식 - 최백규

안식 - 최백규 해변에서 깨끗한 하복이 마르고 있었다 하얗게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우리는 칠이 벗겨져도 썩지 않는구나 손을 모아 죽지 않는 행성을 만들었다 폭설을 떠올려도 하품할 수 있는 절기였다 그러나 눈을 감고 바람을 맞을 때마다 너의 울음소리가 밀려왔다 이것을 포옹이라 불러도 될지 오래 고민했다 언제쯤 나를 멸망시켜야 하나 걱정되었다 더는 새장을 씻길 이유가 사라져도 욕실에 웅크려 앉아 샤워기를 쥔 마음으로 모래만 털다가 부스러진 날엔 잠든 너를 위해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도저히 눈물이 잡히지 않아서 저 세계에서는 내가 죽은 역할이구나 이해했다 눈처럼 재가 날리는 곳에 닿으면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까 고개 숙인 모두가 손바닥을 적시는 사이 그들의 행성을 훔치고 싶어졌다 유..

한줄 詩 2022.08.02

저물녘의 운산 - 변홍철

저물녘의 운산 - 변홍철 문자메시지로 알려주는 대출이자는 참 꼬박꼬박 나간다 꼬박꼬박 내가 지불할 이자를 알려주는 저 근면한 세상의 파쇄기에 옷자락이 말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그대도 나도 오늘 충분히 투쟁하였다 이제 가족들이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며 인색하게 묻혀 올 신선한 바람을 찬거리 삼아 어두운 불을 켜고 밥상을 다시 차릴 시간이다, 1954년 김수영의 '나의 가족'은 지금 그대와 나의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을 겪은, 겪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런 건 표절이 아니다 아직 나에겐 두 병의 막걸리가 남아 있다 아마 금요일까지 남겨놓긴 어려울 듯하다 꼬불치지 말자, 절약하지도 저축하지도 말자, 새로운 날들에는 새로운 술이 반드시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 없이 어떻게 사랑의 모험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랴 *..

한줄 詩 2022.08.02

모서리 - 서화성

모서리 - 서화성 어딘가 모르게 모가 난 사람은 아프거나 슬프다고 말한다 한때는 모가 난 사람이라고 유행가처럼 싫어한 적이 있었다 그런 모가 서리를 만나면 모서리가 되었고 그런 모서리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혹독하다는 말처럼 슬펐다 모서리는 사랑받지 못한 둘째 같은 것 모서리는 자식을 기다리는 우리 엄마 같은 것 살짝이라도 멍이 들면 아프기 때문이다 뾰쪽할수록 더 아프고 슬프다는 것 모가 난 사람은 한 번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고 뜨거운 고백 하나는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은 마음 한구석이 장작불처럼 슬플 것이다 *시집/ 내 슬픔을 어디에 두고 내렸을까/ 시산맥 낮잠 - 서화성 gs 편의점 옆, 삶에 짓눌려 낮잠을 자는 노인이 있다 간혹, 햇볕을 쫓아가는 봄날처럼 길 건너 돈벼락을 맞은 사람이..

한줄 詩 2022.08.01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 강회진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 강회진 도시서 지내다가 가로등 드문드문 마동 마을에 들어오면 먼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 순하고 착해지는 것 같다 먼 미래에 가 있는 것 같다 아무렴,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걸 지켜볼 수 있지 이른 새벽 마당 몰래 쌓이는 눈 지켜볼 수 있고 건너편 거대한 숲 흔드는 바람소리 들을 수 있으니 착하고 순한 건 연약한 걸까 강한 걸까 혼잣말하다가 마당에 어둠이 내리면 제일 먼저 씩씩하게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적당히 불길이 사그라들면 그 불이 아까워 고구마를 구워 낸다 옷에서 불 냄새가 났다 오래전 불 때 밥하던 늙은 어미가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연습의 시간들 일테면 나는 지금 과거와 미래에 적응하는 중이다 그것도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시집/ 상냥한 인생..

한줄 詩 2022.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