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사랑합니다 - 이정록

사랑합니다 - 이정록 제가 드려야 할 말이 아니라 제가 늘 들어야 할 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언젠가 사용설명서까지 올 거라 믿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 상처에만 필요한 약이라고 여겼습니다. 옹알이부터 시작한 최초의 말인 걸 잊어버리고 고쳐 쓴 유언장의 사라진 글자처럼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건넨 흉터들, 그 바늘 자국을 이어보고야 알았습니다. 마중물을 들이켠 펌프처럼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기름에 튀긴 아이스크림처럼 당신의 차가움을 지키겠습니다. 빙하기에 갇힌 당신의 심장을 감싸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말이었습니다. 봉숭아 꽃물을 들인 새끼손톱 초승달에 신혼방을 차리자는 가슴 뛰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을 당신 그대로 사랑합니다. 별자리와 구름의 이름도 바라보는 쪽에서 마음..

한줄 詩 2022.08.17

살다 보면 살아진다 - 박상천

살다 보면 살아진다 - 박상천 '살다 보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에 세우고 한참을 울던 시간도 있었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울컥하며 목이 메어 한참을 멍하니 있는 때도 많았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터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시간도 많아졌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피어나는 꽃들조차 그렇게 싫더니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거지 같다 정말 거지 같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들에 대해 속으로 욕을 하며 살았지만 그 시간들도 그렇게 지나가고 살다 보니 살아졌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시집/ 그녀를 그리다/ 나무발전소 전화 - 박상천 아침이면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그녀의 ..

한줄 詩 2022.08.17

꽃 피던 자리 - 고원정

꽃 피던 자리 - 고원정 온 세상이 속았던 큰 거짓말이 끝난 것처럼 봄꽃들 진 길을 걸어간다 봄이야 또 오고 꽃도 다시 피겠지만 그날 맺혀있던 꼭 그 자리 그 꽃 같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과 나도 지난봄의 그 사람은 아닐 것이다. *시집/ 조용한 나의 인생/ 파람북 낙화 - 고원정 한 잎 작은 꽃이 지는 소리 그리도 커서 먼 별까지도 가는 모양이지만 뚝뚝 따라서 떨어지는 그런 별들도 있다지만 때로는 그 별들의 비가 내린다지만 봄이 다 가도록 손가락 꼽아가며 마지막 하나까지 지켜보았던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끝내 나만 모르는 것일까? 다시 돌아올 꽃철들도 이제 많이는 남지 않았다. # 고원정 작가는 제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여러 소설집을 냈다..

한줄 詩 2022.08.16

역전 - 김영언

역전 - 김영언 배고픔이 가장 큰 추억이었던 시절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마지못해 먹던 것들이 있다 미처 봄이 다시 오기도 전에 보리쌀을 채웠던 뒤주 바닥이 드러나면 자물쇠 채워진 아랫방 고구마 섬을 넘석거리고 뒤꼍 감자 구덩이 속에 짧은 팔을 길게 넣으며 일 나간 부모 몰래 끼니를 뒤져내던 유년이 있었다 풍요가 병이 된 현대의 빈곤 속에서 비만을 예방하기 위해 빈곤을 강요하는 아내가 반어적으로 차려내고 있는 풍요로운 식탁에서 소화불량의 추억을 마지못해 되씹고 있는 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식구들을 검진하고 있는 고구마와 감자는 구미 좌르르 흘러넘치는 흰 쌀밥 대신 반전 없는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집/ 나이테의 무게/ 도서출판 b 나이테의 무게 - 김영언 어느 겨울 산등성이 비탈에서 ..

한줄 詩 2022.08.16

입추 이후 - 김태완

입추 이후 - 김태완 아침이면 창문 밖 뒷산을 본다 언제 입이 피어나는지 어느 무렵에 푸른 잎들이 가득한지 새들은 어느 푸르름 속에서 지저귀는지 창문 밖 뒷산이 사는 시간을 늘 함께한다 입추가 지나자 한낮의 열기는 뜨거워도 저녁 밤공기가 어둠의 온도를 끌어내리고 바람에 몸을 맡긴 산 나무들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 마지막 힘을 모으며 뜨거워지는 중인가보다 발그레한 몇몇 잎사귀들이 노랗게 당황하는 걸 보자면 미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종족의 번식을 위해 자리 잡을 곳을 찾아왔는지 언제부터인가 내 얼굴에 자리 잡은 검버섯 누가 날린 종균인지 알 길 없으나 분명 저 뒷산에서 날아온 전갈 같은 당부로 어서 오너라 너 하나쯤 기꺼이 맞이해야지 어떤 나무로 피어날지 모르는 궁금한 종균을 요즘 토닥토닥 어루만지..

한줄 詩 2022.08.12

오십 - 김백형

오십 - 김백형 반백이라고 하면 머리가 하얗게 센 듯하다 오십이라고 하니 반토막 같다 다시, 반세기! 하고 되뇌어 보니 나도 역사의 한 페이지 같다가 쉰이라고 하니까 쉰내가 난다 지천명은 무슨, 하늘의 뜻을 알 리 있겠는가 나도 모르는데 나는 나를 가두어 온 나이테였다 간신히 뿌리 내렸고 갈 길 몰라 가지에 가지를 쳤고 궤변만 무성한 잎으로 피어내다 낯 붉히며 지고 말았다 몇 번의 대통령을 뽑았고 몇 번의 붕괴에도 용케 살았지만 비명에 먼저 간 형제들 있어 울음은 기억만 남기고 증발해 버렸다 그러나 여직 오십을 돌보는 일흔여섯이 그늘도 없는 텃밭에 쪼그려 앉아 열무 솎아내고 있으니 눈꼬리가 습해 온다 나는 나를 결심하지 않기로 한다 *시집/ 귤/ 걷는사람 똥살개 - 김백형 육성회비도 못 낸 놈이 뒤가 급..

한줄 詩 2022.08.12

마지막 뒤풀이 - 박동민

마지막 뒤풀이 - 박동민 당신이 돌아왔다 눈먼 낙과가 붉은 지팡이로 공중을 지치며 빈 나뭇가지를 찾아가듯 얼어붙은 강을 건너왔다 첨탑의 뿌리가 손금처럼 뻗친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갓 태어난 당신은 눈도 못 뜨고 좁고 긴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한 줌 석양을 마시고 있었다 창문과 창틀 사이에 낀 몇 가닥의 머리카락처럼 곱슬곱슬한 숨을 내쉬는 당신은 낯선 소도시의 거대한 요람인 광장에서 리아스식 발가락으로 붉은 파도를 타고 있었다 훌쩍 큰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 돌아보았다 스무 살의 당신과 마흔 살의 내가 양끝을 붙잡고 돌리는 새하얀 줄 사이로 여든 살 당신이 일렁이고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가 줄을 돌리고 넘고 타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팔을 치켜들며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토너처럼 어둠이 ..

한줄 詩 2022.08.12

적정 온도 - 조온윤

적정 온도 - 조온윤 주민센터에 왔어요 창구에서 나를 응대해준 공무원은 친절하지 않았지만 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기표를 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 그들의 첫인사와 끝인사는 엇비슷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서류를 건네고 다음 번호를 부르죠 전문 기구가 권장하는 겨울철 적정 온도는 이십도 겨울이면 이곳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합니다 평온하다는 것, 지금 내 몸이 식어 있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 손을 잡아도 느낄 수 없을 만큼 투명한 체온이라는 것 다음 사람을 위해 내가 앉은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 휴대전화를 보며 걸어오는 이를 피해 잠시 무해한 공기가 되어주듯이 오늘도 우리는 호의도 적의도 없이 안녕을 건넵니다 용무를 끝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주민센터를 나왔..

한줄 詩 2022.08.11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 - 류시화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 - 류시화 내 마음속에 머무르는 새여 네가 나를 아는 것만큼은 누구도 나를 알 수 없다 너는 두려움과 용기의 날개를 가졌으며 상실과 회복의 공기 숨쉬며 날것인 기쁨과 슬픔에 몸을 부딪친다 너의 노래는 금 간 부리가 아니라 외로운 영혼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희망의 음표를 잃지 않는 내 마음속에 머무르는 새여 내일 네가 어느 영토로 날아갈지는 내가 생각할 일이 아니라 신이 결정할 일 삶이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는 불안해하지 않으련다 삶이 남기고 가는 것도 삶은 전부를 주고 그 모든 것 가져갈 것이므로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나는 이따금 나를 보며 경이로워한다 - 류시화 나는 이따금 나를 보며 경이로워한다 어떻게 이토록 ..

한줄 詩 2022.08.11

첫맛과 끝맛 - 성은주

첫맛과 끝맛 - 성은주 입 안 가득 번지는 팽팽한 길을 더듬는 그 맛이 나를 키워 냈다 엄마 젖꼭지에서 하얀 피가 돌던 날 눈물이 핑 돌던 날 첫맛은 항상 나를 달게 위로했다 밀어내도 게워 내도 맛이 맛을 찾아가듯 아득한 냄새에 침이 고였다 오른쪽보다 왼쪽에서 먹을 때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럴수록 맛은 더 깊어졌다 비릿한 저녁이 저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해 장마를 기다렸다 * 눈 뜨면 지극히 평범한 맛 짜내도 짜내도 단물 빠진 껌처럼 함부로 버려진 그릇에 금이 갔다 엷은 통증이 줄 타고 흐르는 날 먹으면서 숨 쉬는 엄마를 봤다 옆에서 나는 매운맛이 당겼고 맛없는 것들을 죄다 뱉어 냈다 살갗 깊숙이 식어 가는 엄마를 뒤집고 뒤집어도 자꾸 식어 가는 푸른 젖가슴이 부풀어 오르면 엄마의 끝..

한줄 詩 2022.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