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내 눈치도 좀 보고 살 걸 그랬다 - 이명선

내 눈치도 좀 보고 살 걸 그랬다 - 이명선 마음이 마음 같지 않아 천천히 병을 얻었다 생각날 때 밥을 먹고 너와 함께 골목을 걸어 봐도 내 골목은 끝으로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아무 날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사랑을 이어 불렀지만 엄마의 딸이라 말 못 하는 헛꿈만 꾸곤 했다 나를 앞질러 가는 세상에 적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림없는 이야기를 어림잡아 보려는 사람처럼 한 발 뒤로 물러나 나 같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무 날은 아무렇지 않길 바라며 겪지 말아야 할 일을 일찍 겪은 사람과 겪을 일을 먼저 겪은 사람에게도 남은 미래가 있어 나를 보면 조바심이 난다는 엄마의 말을 수긍하기로 했다 이 골목에 비가 그치면 반짝 낮더위가 시작되겠지만 늘 그렇게 무엇엔가 홀려 왔던 것처럼 나를 넘겨짚다가 골목의 끝과 마..

한줄 詩 2022.07.12

진짜 사나이 - 박수서

진짜 사나이 - 박수서 진짜 사나이가 되려나 봐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 주말 연속극까지 꼼꼼하게 챙겨 보고 있어 극의 전개를 상상해 보거나, 방송 시간이 되면 대폿집에서 잔 놓고 집으로 들어오기도 해 탤런트 대사에 웃고, 욕하다가 때때로 고양이 눈망울로 뚝뚝 눈물도 흘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먹을 저녁 끼니는 머릿속으로 짜놓아야 해 돼지 앞다리를 찌개를 할까, 두루치기를 할까, 오징어를 볶을까, 문어는 좀 비싸니까 다음에 해 먹어야지 생각하다 조금 싼 닭똥집이나 껍데기를 볶는 날이 허다해 뼈 튼튼, 눈 맑은, 간 좋은, 전립선 힘쓰는, 폐 영양, 관절 팔팔, 장 콸콸, 피부 탱탱 건강기능식품은 거르는 날 없이 먹고 있어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살아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증기기관차 화..

한줄 詩 2022.07.11

내가 날아오른다면 - 박금성

내가 날아오른다면 - 박금성 늦은 겨울밤 13층 건물의 옥상 난간 위에 앉아 있다 내가 젖먹이 때 발견된 곳은 파출소 옆 아기용 젖꼭지를 물고 있더라고, 방긋방긋 웃더라고 우는 아이는 버려진 아이 웃는 아이는 발견된 아이 발견된 나를 멀리하는 학교 아이들 발견된 놈을 멀리하는 문구점 누나 발견된 짐승을 멀리하는 붕어빵 아줌마 버려지는 것은 휴지와 머리카락 그리고 짐승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보석 발견될 수 있는 것은 휴지도 머리카락도 짐승도 보석도 그 사람이 버려진 아이는 사람 될 수 없다며 장난감 박스를 내려놓았다 난 버려지고 발견된 짐승 사람의 가죽으로 사람이고 싶어 날아오른다 *시집/ 웃는 연습/ 서정시학 유년의 뺨 - 박금성 철새들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고 갈라진 허공에서 태어나는 구름 사이로 아..

한줄 詩 2022.07.11

사랑했었다, 그 가을을 - 황현중

사랑했었다, 그 가을을 - 황현중 억새밭 오솔길을 지나 강둑에 서면 강줄기 따라 큰 기러기들 떼 지어 날고 먼 산 아래 옹기종기 작은 마을에선 하나둘 깜박깜박 불을 밝힌다 한 끼 저녁에 족한 연기를 피운다 하늘에 그 하늘 속에는 배부른 반달이 별들을 낳고 빈 배는 부는 바람을 노 저어 간다 강물이 별들을 품고 어르듯 속삭이는 시간이 오면은 늘 떠오르는 그 얼굴 너 없는 오늘이 꿈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했었다, 그 가을을 *시집/ 조용히 웃는다/ 그림과책 가을의 끝자락 - 황현중 생각하면 목이 메는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황망하게 서울로 떠나간 울 누나의 뒷모습 그것이 사랑인지도 몰랐던 유년의 그 소녀 기우뚱, 산자락 하나가 그림자를 부려 놓는다 바람이 저문 햇살을 물레질하고 ..

한줄 詩 2022.07.10

통속한 여름 - 강시현

통속한 여름 - 강시현 여름이란 세상에 널리 통하는 풍속이나 습속이어서 아름답다 햇살의 커튼이 처마를 걷어 올리는 만삭의 아스팔트 내음, 도시의 과육은 통속종합병원의 정성 어린 진단과 처방에도 물먹은 자두처럼 짓물러 갔다 도시의 처진 눈은 어디쯤에서 만난 통속을 끌어안고 한눈을 팔기도 했고 박꽃에 달빛 쏟아져 자작나무가 하얗게 취한 길을 끌고 오던 밤, 쓰린 공복(空腹)의 숲을 걸을 때 여름은, 햇살을 삼킨 거대한 입으로 연신 하품을 뱉고 통속의 단단한 경계 안에서는 살은 뼈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욱신거리는 빌라촌 불빛에 발이 걸린 별의 군락지가 기우뚱하는데 그 틈으로 여름의 치마 속을 힘끔거리는 축축한 눈초리들 널리 통하는 습속은 그런 것인가 털어놓자면, 통속을 처음 만난 것은 시외버스 차창에서..

한줄 詩 2022.07.10

나에게 - 박용하

나에게 - 박용하 그림자하고 있어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 표정 관리하고 있어도 욕보인 것은 욕보인 것 하루도 잊지 않고 죽음이 다가오듯이 하루도 잊지 않고 죽음에 다가가듯이 말과 글이 일생을 따라다닌다 그날 밤 사소한 태도 하나조차도 따라다닌다 증오는 녹슬지 않고 복수는 용서보다 힘이 세고 일생을 걸어도 바뀌지 않을 나와 일생을 걸고 바꿔가야 할 내가 식탁과 침대를 오가고 햇빛과 달빛을 오간다 내가 죽어야 바뀔 내가 어김없이 오늘도 죽어가고 죽어가기 전에 살아가고 죽을 때까지 살아남아야 하고 정치와 사회를 오가고 사물 같은 사람들 사이를 횡단한다 하루도 잊지 않고 풍경은 내 편이 아니고 자연은 누구의 편이 아니고 내 양심은 혼자 있어도 나를 찌르고 내 생각을 바꿔 놓는 타인들과 내가 바꿀 수 없는 ..

한줄 詩 2022.07.09

여름, 희다 - 강문숙

여름, 희다 - 강문숙 여름에 내리는 비는 희다, 아프다 발등 찍힌 채 칭칭, 하얀 붕대를 감고 절룩이며 걷다가 홀연히 돌아보면 온통 진창이다 몇 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이들이 사라졌다 다시 기억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단애의 시간들 흰 그늘의 슬픔이 짙어진 오후 세 시쯤 쏟아지는 눈물 속으로 내 뼈는 하얗게 부서지고 하늘은 한쪽으로 희뿌연 빗살을 뿌리며 기울어질 듯하다가 우레를 숨긴 채, 곧 제자리에서 눈꺼풀만 겨우 닫는다 누군가 입을 열어 말을 붙인다면 줄줄 흰색으로 흘러나와 순식간에 나를 에워쌀 것 같은 저 빗줄기의 감옥 나는 기꺼이 최선을 다해 미쳐 갈 것이다 그 흰빛에 갇혀 종일 반복 재생하는 음악처럼 칠월 장맛비는 마디가 없다, 길다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꽃의 슬하 -..

한줄 詩 2022.07.09

당신은 미래에서 온 사람 - 하상만

당신은 미래에서 온 사람 - 하상만 노인을 본다 나의 미래를 본다 섬뜩하다 옆에 있는 미래를 보고도 현재는 변화는 게 없다 미래가 후회하는 과거를 현재가 살아가고 있다 사라진 다음 후회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과거에 대해 말한 거지만 미래에 대해 말한 것 과거를 바꾸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사람처럼 아버지가 서 있다 *시집/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걷는사람 병든 몸은 병든 몸으로 돌아간다 - 하상만 오래 아프면 아픈 몸이 정상이다 병에도 관성이 있어서 약을 쓰면 괜찮아지는 것 같지만 원래대로 돌아간다 고칠 생각 말고 심할 때 약이나 먹으라고 살살 달래 가면서 친구처럼 지내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편했다 # 하상만 시인은 경남 마산 출생으로 2005년 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 등이 있다.

한줄 詩 2022.07.07

망각의 소유 - 김영언

망각의 소유 - 김영언 삭막한 도시를 청산하고 공기 맑고 풍경 좋은 전원에서 좀 더 신선하고 낭만적으로 살겠노라 아파트에 비좁게 갇혀 있던 삶을 탈탈탈 불러내어 이삿짐 트럭 한 대에 차곡차곡 쪼그려 앉히다 보니 소유하고 있었으면서도 소유자가 아니었던 것들이 베란다며 거실 구석구석에서 절뚝거리며 끌려 나오고 온몸에 먼지를 덧칠한 채 장롱 위에서 뛰어내린다 소유권을 망각하고 있었던 잡동사니들이 달리는 트럭 위에서 구시렁구시렁하더니 다시는 유폐되기 싫다는 듯 잊혀진 옛사랑의 기억을 되살려놓으려는 듯 청량한 바람을 끌어다가 먼지를 닦아내고 수줍은 나무 그늘을 끌어다가 상처를 메운다 더 이상 남루를 이끌고 오지 않으려고 했건만 망각 속에서 반어적으로 출토된 유물들을 망각의 저장고 같은 삶의 액자 속에 옮겨 걸고 ..

한줄 詩 2022.07.07

나무와 함께 비를 맞다 - 변홍철

나무와 함께 비를 맞다 - 변홍철 너는 한때 행복했던 왕자의 동상처럼 황금의 깃 다 떨구고 섰구나 그러나 오늘 우리 발등에 쌓이는 것은 거름이 되지 못하는 슬픔 그리하여 바닥에 들러붙은 모멸 무거운 청구서와 마지막 달력 서글퍼라 곱은 손가락으로는 집을 수 없는 실마리여 허리 굽혀 더듬어보아도 폐선의 간이역에 뒹구는 도산한 노을 왕국의 채권들뿐 돌아갈 차표 한 장 살 수 없다고 찬비는 내린다 *시집/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 삼창 비 오는 날 - 변홍철 라면 하나에 국수사리 한 줌 더해 끓인다. 콩나물 넣고, 고춧가루도 넉넉히 풀었다. 마당에 감꼭지 다 떨어지고, 모과나무는 수두를 앓듯 이파리 죄 병들었다. 반주로 소주. 어머니 한 잔, 나는 석 잔. 단오 무렵, 어머니는 팔순을 맞는다. 조금 퍼진 것을 ..

한줄 詩 2022.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