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흔한 연고도 없이 - 이명선

마루안 2022. 7. 23. 22:42

 

 

그 흔한 연고도 없이 - 이명선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나의 이야기로 나는 흥건한 바닥이 되었다

고시를 치를 생각 없이 고시원에 있었다 공직자처럼 공개할 재산이나 공제할 가족이 있었다면 고사했을 것이다

열대야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물수건을 올리고 느린 밤을 밝히듯 삶의 낱장을 뜯으며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면

엎드려 자다 목마른 얼굴로 일어났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언뜻 마주칠 수만 있었다면

흥건한 바닥에 배설된 우리가 떠다닌다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듣는 우리의 이야기는 작은 소란에도 불시에 솟구치려는 간헐천 같았다

두 평 남짓한 방에서 우리의 회고록을 쓴다면 공수래공수거라고 써야 할까 공공의 적이라 써야 할까

검은 마스크로 가린 칸칸의 방은 타 버린 낱장만큼 캄캄하고 우리는 그 흔한 연고도 바르지 못하고

없는 만큼만 없었으니 잃을 만큼만 잃어버린 우리의 영결식에 우리가 없어

한 사람씩 배웅하기 위해 마지막 불이 사그라지기 전 연고 없는 사람끼리 무기명 투표를 한다

오늘은 이 고시원에서 저 고시원으로 이주하기 딱 좋은 날이라 하였다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걷는사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이 - 이명선


종일 매달려 한 마리 짐승처럼 바람에 밟히다 보면 나의 안위를 생각해 줄 한 사람으로 오늘의 위안이 될까

내지를 땐 내지르고 싶다가도 나를 다녀간 이의 뒷모습에 상처가 보여 여력 없다는 말에 눈앞이 사라지고 오늘의 안녕과 우리의 미래가 미수에 그칠 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이 바른 기도 같아

걸었다

전시된 사진을 보며 사진전의 제목을 생각하다 내가 늘 문제라서 나답지 않기로 하였다

뭉친 근육을 풀다 보면 집보다 밖에서 아침을 기다리게 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뭉개짐에 대해 귀띔해 주고 싶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면서 자꾸 고장 나서 사람에게로 되돌아가지 못할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사람을 지나다 보면 남 일 같지 않아 처음 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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