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좋았던 옛날 - 정덕재

좋았던 옛날 - 정덕재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나이 든 할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리어카를 매달고 폐지를 쓸어 담는 젊은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오일장 좌판에서 다듬은 파 두 바구니 시들까 우산 하나 받쳐 놓은 할머니가 오이 가지 호박 부추 대파 쪽파 감자 양파 브로콜리 양배추 박스 열 개를 펼쳐 놓은 젊은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의사 아들이 건물을 지었다고 자랑하던 나이 든 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들어간 다음 날 석션은 언제 하냐고 묻자 찡그리며 기저귀를 갈던 나이 든 간병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고단하게 살다 보니 목숨줄이 더 모질어졌다며 송대관 노래처럼 해 뜰 날이 올 줄 알고 고단해도 견뎠..

한줄 詩 2022.07.19

실업의 무게 - 서화성

실업의 무게 - 서화성 어제는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하늘에서 햇볕이 쏟아진 날 윤슬을 본 지 오래다 식탁의 거리는 급여일과 좁혀지지 않았으며 식탁에서 말의 간격보다 멀어져 있었다 며칠째 콩나물국과 말라버린 콩나물무침이 전부였고 김이 빠진 쉰밥을 찬물에 말아 먹는다 탈색이 된 회색 작업복은 일용의 본분을 다했는지 소금꽃이 피어 있었다 한때 통장 서너 개가 배불러 있던 시절, 하루걸러 밥 먹자던 사람은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 떠나기 시작했다 돌탑처럼 쌓여 있는 이빨 빠진 그릇들 꾸역꾸역 헛배에 두꺼운 벽지를 바르고 있었다 졸음이 밀려오는 시간에 오래된 빵집에서 허기가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해남부선을 타면 내가 두고 온 바다에 갈 수 있을까 실어증을 앓는 사람처럼 바다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주절주절 ..

한줄 詩 2022.07.18

사막 - 신동호

사막 - 신동호 서편으로 가는 동안 이별이 다가온다 사막은 깊고 멀어야 한다 별이 내려 작은 모래와 살을 맞대고 지나온 기억들은 반짝인다 부르카가 흔들리지 않는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한 느린 걸음 내가 낙타였을 때, 사막의 밤은 우주 저 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라비아의 공주는 앞으로 뒤로 내 걸음의 리듬을 맞춰주었다 초승달 같은 눈을 만나면 지금도 나는 허리가 아프다 저녁을 향해 걷는 동안 나는 늘 모래처럼 작아졌다 모래 언덕이 수세기를 건너왔으나 지금도 모스크로 총총, 멀어져가는 사랑 모든 신들은 사막에 산다 목마른 자들만이 신들을 추억한다 숨을 곳이 없는 자들만이 죽음을 마주한다 심연이 이내 신들이 되곤 했던 그곳 걸음들이 깊은 발자국만큼 겸솜해지곤 했던 사막 끝, 그곳 어디 *시집/ 그림자를 가지..

한줄 詩 2022.07.18

순간을 지르는 순간 - 박봉준

순간을 지르는 순간 - 박봉준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은 추락하는 새의 날갯짓이 더 매혹적인 순간을 안다 난간 끝에 서 있는 모녀의 두려움은 이미 허공으로 날리고 죽음을 앞세우고 저토록 진지한 생을 그려내는 모습이 나는 부끄럽다 서천의 붉은 구름이 그녀에게 속삭였지 생은 지나가는 바람이야 죽음은 가장 쉬운 방정식 번지점프대 위에 선 피에로 불신의 고리가 길어질수록 우리를 웃게 하지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난간 끝에 서 있는 사람들 정말 마지막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다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상상인 피고 지고 - 박봉준 전신마취를 하고 깨어보니 죽는 건 순식간이라는 말, 허언이 아니었네 채 꿈도 꾸지 못한 순간이 수술실 밖에서는 어느 한 생이 가장 긴 강으로 흘러 수없이 솟구치고 잠겼..

한줄 詩 2022.07.18

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그동안 먹었던 과일 하나도 실은 얼마나 숱한 다른 도사리들의 희생과 헌납이 깊이 떠받들어진 것이었는지 간 봄날 쏟아져 나와 천지를 꽉 매웠던 그렇게 잠시 공중에 우르르 몰려나와 얼굴 붉히던 복사꽃들 지고 꽃자리마다 만원 전동차 안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작은 열매들 나는 그걸 솎아 준다고 나뭇가지에 성상(性狀) 좋은 놈 한둘 남기고 다 훑어 내린다. 그래도 결실 떠안을 놈만은 악착같이 움켜쥐고 매달린다. 그 풋열매는 떠맡은 그대로 이내 제 곳간을 열어 햇볕과 바람 그리고 끝내는 이 건곤마저 들여 쌓겠지. 올해도 잘 익은 복숭아 몇 알의 채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익지 못할 풋실과들이 죽어야 했는지 솎임을 당해 붕락했는지.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낙과를 보며 - 홍신선 완..

한줄 詩 2022.07.17

밥풀에 대하여 - 김신용

밥풀에 대하여 - 김신용 밥풀때기라는 말이 있다 쓸모없고 하찮은 것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유난히 정겨울 때가 있다 아기의 입가에 붙은 밥풀을 얼른 떼어 제 입에 넣는, 어미를 보는 날이다 이런 날은 쓸모없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참 눈에 밟히는 날이다 밥풀 하나가, 마치 소우주처럼 눈앞에 밝아오기 때문이다 *시집/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 백조 소금꽃 - 김신용 아무도 이 꽃을 본 적 없지만, 이 꽃은 있다 땀 흘려 일해보면 안다 사람의 몸이 씨앗이고 뿌리인, 이 꽃—. 일하는 사람의 몸이 소금이 꽃인, 이 꽃—. # 김신용 시인은 1945년 부산 출생으로 1988년 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 , , 등이 있다.

한줄 詩 2022.07.17

자기 해방의 태도 - 박노해

자기 해방의 태도 - 박노해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을 굳게 신뢰하는 것 쉽게 인정받거나 쉽게 실망하지 말고 숫자에 좌우되지 않고 나아가는 것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고독을 기꺼이 견지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 완전한 일치를 바라지 말고 고유성을 품고 공동으로 협력하는 것 삶의 자율과 인간의 위엄을 지키며 불의와 맞서 끈질기게 전진하는 것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긴 호흡으로 사랑하고 일하고 정진하는 것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신은 감사를 거절한다 - 박노해 만약 내가 팔레스타인에 태어났더라면 만약 내가 아프카니스탄에, 이라크에, 버마에, 다르푸르에, 북한에 태어났더라면 가난과 분쟁과 억압의 나라 앞에서 피와 눈물에 젖은 사람들 앞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감사하다면 저들의 불..

한줄 詩 2022.07.17

남해 도솔암 - 이우근

남해 도솔암 - 이우근 도솔암 가는 길은 굽이마다 형편대로 눕는다 그리고 불시에 일어나 하늘까지 닿는다 바람소리에 해조음(海潮音)이 들린다 산은 조바심 없이 밭은기침으로 자신의 벽을 연다, 아무도 모른다 마음이 바르다면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무슨 상관이랴 높낮이의 위치가 무슨 상관이랴 낙엽과 해초가 이웃이지 말란 법도 없다 잦은 바람이 물결로 이마를 어루만질 때 비로소 미망(迷妄)을 따져본다 사람들의 계산은 이미 부질없지만 더하고 곱해도 빼고 나눔은 없더라만, 그래도 곱씹은 아득한 희망 손톱 깎듯 낮달을 똑, 따서 발바닥 아래 던져 꽃피길 바란다 등산화 신은 나를 제치고 고무신 신은 노보살이 땀조차 흘리지 않고 휑하니 지나간다,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 쪽박 때리듯 두들겨 패는 목탁 소리 결코 풍경 소리 이..

한줄 詩 2022.07.16

벗, 그대는 안녕한가 - 부정일

벗, 그대는 안녕한가 - 부정일 혼자 벽 보며 잠들다 이른 새벽 거울을 보네 거울 속에 흰머리 노인이 나를 보네 어느 길가쯤에서 만났던 사람 같은 싸락눈 오다 그친 마당을 서성이네 창 너머 아내가 티비 보는 거실 몇 번 훔쳐보면서 온기 없는 마당만 서성이네 달랑거리던 불알은 이미 없는 듯 쪼그라들고 아버지 귀두 닮은 작은 흔적 주섬주섬 찾아 후미진 구석 몇 방울 흘리고는 아내 외출에 동동거리던 자 안으로 드네 어디를 가시는지 말하지 않네 언제쯤 오시는지 물어보지 못하네 물어본다는 것이 쓰나미 같은 것이어서 무관심해야 할 노인이 감당 못할 일이어서 꽃피던 시절은 이미 익숙해진 절망이어서 이제는 다 내려놓고 절망마저 다독일 때 하찮은 외로움이야 공원 어디쯤 사연 많은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 가면 될 일 벗이..

한줄 詩 2022.07.16

거짓말 이력서 - 성은주

거짓말 이력서 - 성은주 최초의 거짓말은 여섯 살 놀이동산에서 시작됐다 엄마는 내 손에 풍선 끈을 쥐여주었다 놓치지 마 정말 먼 곳으로 사라지는지 궁금해서 일부러 풍선 끈을 놓았다 엄마 원피스 자락을 붙들고 혼날까 봐 더 크게 울며 놓친 척했다 캉캉춤을 추던 무용수가 내 최초의 거짓말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 후로 종종 거짓말할 때마다 속치마 들썩이듯 넘어지는 꿈을 자주 꿨다 * 함께 차 타고 커브를 돌 때 연인의 머리카락도 길어졌다 우리의 교집합에 또 다른 동그라미가 빗금을 쳤다 당신은 너무 아래에 있어요 계속 그어지던 선 지우는 방법을 몰랐다 긴 통로에서 과일 껍질처럼 앉아 있는 당신을 내가 지워 놓고 당신이 날 떠났다고 슬픈 척했다 갓 지은 쌀밥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올 때 금방 식을 거라 생각했다 매..

한줄 詩 2022.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