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일몰 - 함명춘

일몰 - 함명춘 일몰 직전이다 힘차게 뛰던 파도의 맥박이 조금씩 잦아들고 잠시 숨을 고르는 새 떼들이 허공에 못이 되어 박힌 채 지나왔던 길을 가만히 되돌아본다 참 탈도 많았던 길이었지 삶은 누구나 미처 다 읽지 못한 아픔의 책 한 권씩은 갖고 있는 거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각자의 하루에서 돌아온 물결들 하나둘씩 세상에서 가장한 편안한 잠을 준비하고 떠난 줄 알았던 적막이 그리움을 향해 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나뭇잎들을 어루만지며 수평선을 넘어온다 파도의 숨이 뚝 하고 끊긴다 일몰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부터 초심처럼 입술을 깨물며 별이 뜨고 아무것도, 더 이상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 다짐하며 바람이 분다 이제 밑도 끝도 없는 죄책감의 핀셋에 꽂혀 곤충처럼 버둥거리는 나를 그만 용서해 줘야지 이미..

한줄 詩 2021.02.18

가장 먼 길 - 이산하

가장 먼 길 - 이산하 ​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 숟가락이 밥 속으로 수직으로 푹 찔러 들어가 바닥을 긁고 나면 비로소 젓가락은 수평을 이룬다.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딘다. 나는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임을 깨닫는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바닥 - 이산하 ​ 누군가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봤다고 말할 때마다 누군가 인생의 바닥의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말할 때마다 오래전 두 번이나 투신자살에 실패했다가 수중 인명구조원으로 변신한 어느 목수의 얘기가 떠오른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강에 투신자살하면 거의 '99대 1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시신의 99%는 강물 속으로 가..

한줄 詩 2021.02.18

시간을 굽다 - 이강산

시간을 굽다 - 이강산 속병 덕분에 방 한 칸 얻어 떠나와 맵고 짠 욕망과 인연은 그만 끓이겠다며 잠근 불판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깜박 침묵의 이불에 눕다 깨어보니 두 시 반이 아홉 시 반으로 익어버렸다 낮이 까맣게 타버렸다 방 가득, 공복의 마음 가득 시간의 누룽지 냄새가 매캐하다 타다 만 모퉁이 시간을 마저 굽고 긁어낸 누룽지가 지장암 석탑이다 백 년쯤 홀로 견딜 만하겠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멍게의 방 - 이강산 -살아있는 멍게 있습니다 4차선 횡단보도 곁, 깡마른 멍게 장수 사내의 목소리가 금방 구워낸 고구마 속처럼 뜨겁다 우수(雨水)의 밤이 염천이다 남도에서 예까지 맨발로 걸어온 듯 저 붉은 발가락들, 상처들, 모닥불처럼 끌어안고 견디는 객지의 하룻밤 저 횡단보도란 살아있는 호..

한줄 詩 2021.02.17

사이 - 박구경

사이 - 박구경 들판 이쪽 저쪽으로 미루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잦은 기침으로 이파리 한두 개를 떨구며 겨우 서 있다 곧 거칠고 쓸쓸한 저녁 해가 곰골 뒤로 스러지고 말 것이다 지난 겨울 눈이 어깨에 쌓인 밤 눈썹에 쌓인 밤 떡국을 사러 나선 길에 치매로 세상을 마쳤다는 길갖집 소식을 듣고 전봇대처럼 박혀버린 들판 저쪽에서 새까만 철골 몇 개가 바람 소리를 치며 떨고 있다 철골 위에 눈썹이 앉아 있다 날개를 펴다 만 새 한마리가 앉아 있다 느닺없는 슬픔으로 오히려 내가 불쌍해지는 들판이다 *시집/ 외딴 저 집은 둥글다/ 실천문학사 도시락 - 박구경 이 눈물의 도시락을 간곡하게도 전언이니 다시 전하기를 납작 엎드린 길 너머론 구름이 어지럽게 흘러가고 바람은 멈추어 시커먼 나무 그림자 속에 있었다고 한다 ..

한줄 詩 2021.02.17

내면에 든다 - 허림

내면에 든다 - 허림 삼 년 전쯤인가 카드 돌려막기로 한 달 한 달 근근이 살아내고 있을 때 그 밑돌 빼는 일마저 막히고 셋방 빼달라는 통첩을 들었을 때 내면에 사는 그에게 문자 넣은 적 있다 그 말이 옹이졌는지 내 창고 지으려는 터에 오막 지으면 들어와 살래나? 묻길래 물론이지 여부가 있나 그 후, 생의 오막에 드는 날이면 개똥벌레 날아 길이 환했다 *시집/ 엄마 냄새/ 달아실 첩첩 - 허림 내면이라는 곳은 내면일 뿐 광원이나 명지리 달둔 월둔 살둔 사월평 원당 일어서기 같은 이름들과 큰한이 작은한이 경천 문암 절에 가덕 같은 골짜기에도 바람은 불어오고 눈이 내렸다 하면 한 길씩 빠져 꺽지나 텡가리처럼 터살이 하는 곳 살다보면 대추나무 연실 걸 듯 서로 사는 집들이며 얼굴이며 말씨며 말투도 닮고 입맛까..

한줄 詩 2021.02.16

슬픔의 알고리즘 - 정이경

슬픔의 알고리즘 - 정이경 여러 날 집을 비운 적 있다 하루에 한 번은 짧은 햇살이 작은 창에 머물고 바람이 몇 차례 드나들기도 했을 테지만 자른 무를 담아 두었던 주방 창문턱 유리그릇 물은 바싹 말랐고 보라색 무꽃을 피워낸 꽃대의 목은 꺾여 있었다 인기척 없는 집에서 어쩌면 스스로 사물이 되기로 하였는진 모르나 한동안은 혼자서라도 오롯이 살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생명이라는 그 가녀린 목숨을 붙들고 오래 아팠던,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남동생이 하늘로 갔다는 지인이 전한 부음 남은 가족들이 '있고, 없고'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과 함께 떨어져 살지만 건강한 나의 남동생이 오버랩되면서 수척해진 낯빛의 그녀를 미안하게 껴안는다 술잔들이 비워지고 식사를 끝내는 사이에도 어깨며 등 전체가 흐느끼는 장례식장 ..

한줄 詩 2021.02.16

나의 장례식에 가서 - 이병률

나의 장례식에 가서 - 이병률 싸늘한 표정 없이 최대한 웃으려고 마음을 먹으며 나는 내 장례식장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보 위에 머리카락이 보여 쓰다듬듯 떼어내려는데 반투명의 비닐 테이블보 밑에 겹쳐서 깔아놓은 다른 테이블보에 들어 있는 머리카락, 차려진 음식 접시들을 이동시키고 테이블보를 살짝 들어 걷어내자니 하필 머리카락이 상 정중앙에 있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다 내린 다음 테이블보를 벗겨낼 수도 없고 접시로 그것을 가려놓자니 다음 자리를 생각하면 치워야 할 것 같고 돌에 돌이 박혀 있는 형국이다 내가 자리를 떠난 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괜찮지 않은 그것 나는 나에게 문상 가서 남의 머리카락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나는 살아 있을 때 검은색 위에 붙은 검은 머리카락..

한줄 詩 2021.02.16

밤기차 타는 새벽 - 정기복

밤기차 타는 새벽 - 정기복 문풍지가 부엉이 흉내를 냈다 초생달 젖은 장독대 정한수에는 합장한 주름이 서늘한 별빛 함께 담겼다 울타리 넘어온 바람이 육 남매를 흩어놓고 막내는 밤기차 타기 위해 시오리를 꿴다 아버지, 탄광에서 얻은 허릿병 끌고 산비탈 진흙밭 평생 팔아 사들였다 고구마 빨갛게 캐어낸 가을 한숨 섞인 소원, 삼베옷 칡넝쿨로 동여맨 채 봉긋한 밭언덕이 되셨다 살내음, 땀내음, 삭인 향내 그윽히 소울음 기적이 흔들어놓은 마당을 한 바퀴 돌아 사발의 기포로 달아붙는데, 이제 그 어떤 세월의 한기가 정한수 가득 담길까 옷깃 여미며 걷는 바람 찬 이 새벽에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어떤 청혼 - 정기복 바다 쉴새없이 뒤척여 가슴에 묻었던 사람 하나 십 년 부대껴 떠나보내고 달무리 속 대보름달 ..

한줄 詩 2021.02.16

마포대교 - 손석호

마포대교 - 손석호 추락하는 게 질문 많은 내게 대답하는 것 같아 망설이는 오후가 수면에 발자국을 내는 동안 호주머니 속 출렁이는 우울 흐릿해지고 싶어 눈물 커튼을 펼쳐도 고드름처럼 자라나 찌르는 햇살 건너도 또 다른 건너편이 지켜보고 있고 지금이 어제 읽은 일기 같아 돌아보면 내게 둘러져 있던 내가 잃어버린 목도리처럼 말없이 내 몸을 벗어나 있어 내려다보는 즐거운 통증 내게는 난간이 없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파란출판 우화(羽化) - 손석호 한 번도 날아 보지 못했던 당신, 앰뷸런스가 모시나비처럼 오르락내리락 고개를 돌아 나가고 유서를 대신하는 냄새가 문밖으로 빠져나온다 명치끝을 꾹꾹 눌렀던 천정의 형광등이 오랜 용화(蛹化)의 얼룩을 내려다본다 기다림의 등이 휜 것처럼 출입문 쪽을 응시한 머리 ..

한줄 詩 2021.02.15

플랫이 붙은 어느 노동자의 악보 - 조우연

플랫이 붙은 어느 노동자의 악보 - 조우연 그의 악보엔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명쾌하게 그를 연주해줄 바이올린 같은 여자도, 스타카토로 패배를 튕겨줄 아이도 없이 그는 지금 공사장 옆 전주콩나물국밥집에 혼자 앉아 저녁을 먹고 있다 뚝배기에 악보를 구겨 넣고 휘휘 젓는다 엉긴 노란 음표들이 고음으로 끓었다가 반음으로 가라앉는다. 좌로 좌로 반음씩 내려가다 보면 불 꺼진 그의 반지하 빈방이 나온다 기울어진 그의 음계는 단조롭기 짝이 없다 단조롭다는 것, 그 음울한 G단조의 반복 낡은 현악기처럼 구부러진 어깨 너머로 소주 한 병이 반주되고 있다 대가리가 두 쪽 난 사분음표 두어 개 얼마 전 추락한 십년지기는 덥다고 안전모를 쓰지 않았다 사는 데에는 따로 주법이 없다는 위안으로 막잔을 비운다 그는 조금 알레그..

한줄 詩 202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