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왜행성 - 김태형

왜행성 - 김태형 먼 하늘을 올려다보니 심장 한 쪽이 무너지고 있는 게 보인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아직 한 쪽의 심장이 남아 있다 남은 심장 한 쪽으로 돌이킬 것인가 그 힘으로 얼음덩어리와 운석들이 가득한 곳으로 저 암흑까지 조금 더 가 볼 것인가 선명하고 밝은 심장 한 쪽이 거대한 운석의 충돌 때문에 생긴 것이라니 남은 한 쪽의 심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했지만 정작 사라진 사람은 나였다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나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키려고 보이지 않아야만 했다 남은 심장 한 쪽에 얼어붙은 대평원이 없었다면 한 쪽의 심장마저 잃고야 말았을 것이다 궤도를 끊고서 떠돌다가 먼지가 되거나 파편이 되어 다시 돌이키려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영원토록 어둠이 되었을지 모른..

한줄 詩 2021.02.15

시간의 정오(正誤) - 전형철

시간의 정오(正誤) - 전형철 -종로 3가 오랜만이다 별을 문진하느라 5분쯤 늦을 것 같아 소설의 지문 같은 말 자주 이름이 보이더라 오늘 달과 화성과 금성이 직렬한대 우리가 모일 수 있는 최적의 편성표겠지 다리를 묶어두거나 의자를 좀 당겨 앉아 4년마다 1초쯤 느려지거나 빨라지겠지 이런 날엔 눈은 주머니에 넣어 두고 집을 비우는 거야 울타리에 묶인 종은 하루만 울고 네 번째 간빙기에는 붉은 심장을 문밖에 쌓아두고 다음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보는 거야 땅속 길이 너무 뜨거워 막차는 주말에 달라지겠지 지구가 멸망하면 인사하자 너는 누구의 행성이니, 우리는 누구의 얼굴이니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건강검진 - 전형철 올 것이 왔다 약속을 미루고 몇 번이나 퇴짜를 놓았지만 시민은 곧 용병, ..

한줄 詩 2021.02.10

트럭의 우울 - 고광식

트럭의 우울 - 고광식 ​ 폭설을 맞으며 폐업을 하는 피자집 상처를 긁어내기 위해 트럭이 2.5톤 짐칸을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이민다 피자 굽는 냄새에 행복하게 웃음 짓던 아이들의 표정을 짐칸에 싣고 나면 슬픔은 손으로 두드려 만든 피자처럼 쫄깃해진다 시린 눈송이는 환하게 불 켜진 철거 현장으로 문득 멈춰 서서 내린다 피자의 맛마저 떠올릴 수 없이 구겨진 차림표가 아무렇게나 부서진 벽돌과 함께 짐칸에 실리면 개업식 때 이벤트로 쏘아 올린 음악 소리만 쾅쾅 짐칸을 홀로 울린다 띁어낼수록 더 허기가 지는 가게 안 실내장식 소품들이 부러진 갈비뼈 드러낸다 하나씩 비워 감으로써 상처 난 살에 새살이 돋는 걸까 논고개로 택지 개발 지역 버스 정류장 앞 인도로 머리만 내놓은 트럭에 실리는 탁자와 의자가 쭉정이처럼 ..

한줄 詩 2021.02.10

잠 - 박윤우

잠 - 박윤우 2,500원,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창가 의자가 공짜 구름의 힘을 구경하는 것도 공짜, 눈 뜨고 조는 것도 공짜다 엄마는 나를 뱃속에 채우고 아홉 달 반을 뭉쳤다했다 덜 뭉친 나를 꺼내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동티나지마라! 느티나무에게 물 떠놓고 빌었다고 정한수와 수수팥떡의 효능일까 리필 받은 아메리카노가 묽어서일까 앉으면 존다 기다리는 너는 오지 않고 건너 유리창에 비치는 저 남자는 잠 좀 아는 남자, 막무가내 잠의 손잡이를 세 시간 째 움키고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VOD스크린 한 편의 영화에는 몇 번의 키스신이 들어갈 수 있나? 몇 사람이 죽어나가야 끝이 나나? 키스타임은 이미 끝이 났고 죽을 사람 다 죽었는데 여태 의자를 업은 채 조는 남자 이런! 내가 저 남자였다니 입지 않을..

한줄 詩 2021.02.10

뜨거운 포옹 - 김태완

뜨거운 포옹 - 김태완 눈발 휘몰아치는 겨울 한복판 기차역 대합실에 몸을 실었다 웅성거리는 대합실 눈발처럼 부산한 사람들 어디를 가야 할 사람들 어디서 오는 사람들 틈 사이로 꾸부정하게 들어오는 냉기 잘 들리지 않는 뉴스를 보는 사람들 무표정한 자막처럼 흘러가는 긴 꼬리의 하행선 기차가 덜그럭거리며 역무원의 깃발과 멀어질 때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들 코트에 떨어진 눈을 털며 들어오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며 연착된 시간을 향해 투덜거리는 젊은 여자의 힐 소리 마술 지팡이가 되어 주문을 걸고 소원을 말하고 싶은 겨울 한 복판 날리는 눈발들 기다림의 시간은 겨울과 닮아 차고 냉정한 여자의 짙은 화장, 가려진 표정 피하고 싶은 겨울 눈발처럼 접고 접어서 날린 공연한 옛 추억에 모두가 잠시 우수에 젖고 ..

한줄 詩 2021.02.09

이것은 재난영화가 아니다 - 손남숙

이것은 재난영화가 아니다 - 손남숙 미세한 먼지에 속박당하고 미세하게 삶이 균열되는 시절에 이르렀다 거룩한 공장이 우리의 즐거움을 가공할 때도 있었으나 토양은 더럽혀지고 숲은 은밀했던 보물을 피로 물들인다 걸음은 활기찼고 아름다운 아기는 계속 태어났다 힘찬 도약을 맹세하는 건물들이 위풍당당하게 풍경을 압도한다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던 남자는 누군가 목을 잡고 흔드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일을 경험한다 폐지 줍던 노인들이 사라진다 소녀들은 입마개를 하고 임산부는 외출하지 않는다 24시간 뉴스에서는 오늘의 날씨와 미세한 배후에 대응하는 자세를 알려 준다 먼지로 덮인 생활의 참사들, 달라질 장소들, 죽어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사가 준비된다 오직 자연만이 먼지의 지옥을 걷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대지에 늘어뜨려..

한줄 詩 2021.02.09

화장 - 류성훈

화장 - 류성훈 헐벗은 어깨 위로 아낌없이 쏟아지는 건 저녁뿐 너는 깨진 이빨과 소용없는 소리들만 천천히 줍는다 이제 좀 쉬어, 어제의 운세만큼 어긋난 목덜미를 밀어 올리는, 집어넣을 것 없는 신발을 신는 그런 휴식 수고 많았고 오늘도 못 받았고 더 보내 줄 것 없는 언덕이 송전탑까기 걸어오면서 녹은 쇠에서 피어나고 그곳에서 너는 쇳물을 마실 거야 그러나 수저는 놓지 말라던 비틀어진 네가 아직도 네 이전의 무게를 불안하게 받치고 있는 날, 여긴 그만 와, 잠들고 싶은 공원의 눈앞에선 네가 세운 철근도 깨끗해 보여서 먼지바람 속에서 내년만 빛나던 라면 봉지를 보았을 때 나무젓가락이 잘못 부러졌을 때 어색한 말을 어디로도 놀리지 못하던 저녁 단단해진 네가 더 어색하게 서 있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

한줄 詩 2021.02.09

행복을 표절하다 - 이운진

행복을 표절하다 - 이운진 이제는 천사들도 우울한 시대 끊임없이 새로운 날개를 바꿔 보여 줘야 하는 시대에 고독과 부드럽게 사귀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떠돈다 여행자도 방랑자도 순례자도 아닌 모습으로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 떠돌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사진을 찍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미소를 짓고 똑같은 개와 고양이 똑같은 갈망 똑같은 멜랑콜리 아래 부탁보다 더 간절하고 외침보다 더 크며 그물보다 더 촘촘한 해시태그들 별처럼 반짝인다 세상 어디든 똑같이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하루 달과 꽃을 가지고도 완전히 행복하지 않을 때 이런 밤에는 외로움도 필요하다는 걸 나는 언제쯤 알게 될까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따뜻한 반어법 - 이운진 다음 해, 꽃이 피면 당..

한줄 詩 2021.02.08

착한 눈 메우기 - 윤유나

착한 눈 메우기 - 윤유나 저 자는 나를 키우기에 너무 고단해 나쁘지 않았어 저 자는 나를 돌보기에 너무 병들었어 나쁘지 않았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고서 나는 아팠어 낚시를 떠났어 내 입버릇이 결국 나를 떨궜나 저 자는 늙는 것에 중독되었던 거야 나쁘지는 않았어 저 자가 원하는 걸 알고 있었어 나쁘지는 않았어 산이 어째서 파랄까 섬에서 낚아 올린 물고기는 모조리 반 토막이 나 있었어 어째서 아가리와 꼬리를 놓고 나는 매번 피리 같은 리본을 선택할까 백합밭을 지나 토끼밭을 지나 나비밭을 지나 눈이 내린다 길고 험한 눈이 오늘도 마땅한 하인을 찾을 수가 없었어 무릇 믿음이 바로 이 자를 결딴내고 말 것이기에 내가 나를 데리고 집을 나온 후부터 나는 몽땅 추위에 떨고 샐러드를 먹다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

한줄 詩 2021.02.08

당신을 잊는 습관이 있다 - 최세라

당신을 잊는 습관이 있다 - 최세라 아무렇지 않은 각별함으로 도화지를 편다 누군가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그 집에 볼펜을 두고 나왔다는 것 당신은 그것을 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그리다 만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선 그 볼펜이 꼭 필요한데 이곳은 레고처럼 맞춤한 세계 딱 들어맞는 세계 하얀 레고 나무가 서 있는 풍경 속에 들어가 모르는 사람의 대형견과 함께 살아 보는 것 비오는 날 몰래 물을 흘려보내 보는 것 이런 일들에 나는 익숙해져야 할 때입니다 나는 나무 대신 나무가 되고 싶어요 멀찍이 혼자 있을 때 내 머리카락 사이로 야맹증을 앓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나는 등에 뭇별을 가득 지고 있는 나무, 수도꼭지 틀어놓고 인디고블루 굳은 물감을 붓으로 씻어내는 온몸의 나무, 그러나 팔레트 바닥에 여전히 얼룩이 남아 있..

한줄 詩 2021.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