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울음이 길고 붉다 - 김유석

울음이 길고 붉다 - 김유석 는개는 적시는 몸이 붉다. 는개는 내려온 허공을 바닥으로 바꾸어 몸에 두르는 울음이 붉다. 밟히면 꿈틀하는 것은 몸이 아닌 울음. 늘였다 줄였다, 주름으로 이룬 것들의 몸은 길다. 제 살보다 무른 데만 뒷걸음질 치듯 짚어가는 그것의 울음도 가지런하게 길다. 일획의 생, 머리에서 꼬리까지 땋는 길이 허공보다 아득하여 는개는 오는 날은 길고 붉은 것들이 공중에서 기어 나와 운다. 지르렁 무지르렁, 묽은 초저녁 뒤안을 자기공명하며 저렇게.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상상인 울음주머니 - 김유석 애비도 모를 씨 사람 손에 받아와서 사산한 새끼 눈 뒤집고 핥아대는 어미 소. 몸에서 함석 두레박 내리는 소리 같은 게 샌다. 이미 죽은 줄 뱃속에서부터 알았지만 그런 짓밖에는 도무지 ..

한줄 詩 2021.03.11

난전 - 손석호

난전 - 손석호 청량리동 길가의 뙈기밭입니다 도시라서 말끔하게 세수한 쑥 달래 냉이 씀바귀 달동네처럼 소복하게 모여 살아요 급하게 뜯어낸 푸성귀처럼 간신히 몸만 뜯어내 기차를 탔기 때문에 뿌리가 고향에 남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아직 뿌리내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은 바닥이 너무 딱딱했어요 빌딩 골 사이로 해 떠오르면 계절에 맞게 제철 푸성귀가 풍성하게 자랍니다 단지 뿌리내리지 못할 뿐 꽃 같은 게 피지 않을 뿐 등 뒤 도로에 차들이 쉼 없이 흐릅니다 강물에 뛰어들던 어린 시절처럼 몸을 던지고 싶을 때가 있지만 바라보기만 해요 조금 아플 것 같아서 어디로도 떠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이곳에서 계속 푸성귀를 기르려면 소나기를 피하듯 단속원을 피할 줄도 밭을 통째로 옮기는 방법이나 가짜 안개로 은폐하는 요령..

한줄 詩 2021.03.11

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 김희준

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 김희준 글을 모르는 당신에게서 편지가 왔다 흙이 핥아주는 방향으로 순한 우표가 붙어 있었다 숨소리가 행간을 바꾸어도 정갈한 여백은 맑아서 읽어낼 수 없었다 문장의 쉼표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태양은 완연하게 여름의 것이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선 계절을 팔았다 설탕 친 옥수수와 사슴이 남긴 산딸기 오디를 바람의 개수대로 담았다 간혹 꾸덕하게 말린 구름을 팔기도 했다 속이 덜 찬 그늘이 늙은호박 곁에 제 몸을 누이면 나만 두고 가버린 당신이 생각났다 찐 옥수수 한 봉지 손에 들었다 입안으로 고이는 단 바람이 평상에 먼저 가 앉았다 늦여름이 혀로 눌어붙고 해바라기와 숨바꼭질을 하던 나는 당신 등에 기대 달콤한 낮잠을 꾸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보지 않고도 키가 자란다 기다리는 마음..

한줄 詩 2021.03.08

나는 보수 중이다 - 정선희

나는 보수 중이다 - 정선희 ​ 한 달 전에도 두 달 전에도 여전히 옆집은 보수 중이다 1층과 2층을 분리해야 해요 집안으로 난 계단을 없애고 밖으로 계단을 새로 만드세요 각자의 대문을 갖는 게 좋아요 커다란 통유리로 거실을 마당까지 확장해 보세요 이 사람 저 사람의 충고를 들으며 집은 점점 복잡해졌다 아직까지 집은 완성되지 않았다 남자가 내게 물었다 새 여자를 들이는 게 나을까요? 애들 엄마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까요? 애들 엄마는 아이 셋을 두고 바람 많은 5월의 녹색을 따라 집을 나갔다 새 여자는 남자의 행복을 위해 밥을 한다는 여자였다 나는 낡은 집은 싹 허물고 새로 짓는 게 낫다고 했다 나는 어때요? 남자는 빤히 나룰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보수 중이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

한줄 詩 2021.03.08

수선화 전입 - 박병란

수선화 전입 - 박병란 섬의 앞마당에는 바람이 전부였다 햇살이 바람을 이길 수 없는 곳 바람 없는 날도 바람을 볼 수 있는 곳 키 큰 나무 몇 그루라곤 죽은 전봇대가 유일하게 살아 줄을 타는 곳 전깃줄에 앉아 똥을 싸는 까마귀의 일몰과 시차를 겪는 수선화의 입장 전입한다고 다 주민이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이쪽으로 돌아눕다가 저쪽을 기별하는 물잔디같이 납작한 말 천천히 듣다보면 좌표 잃은 바람처럼 딱지 앉는 말 여기서 나는 익명이었다 방편 없이 문을 나서는 외지인의 등 뒤로 소란 없는 바람의 착지 참견만큼 친절한 것이 또 있겠는가 생각한다 수선화가 피어난다 표정을 표정으로 갚지 않으며 서두르지 않으며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북인 화답 - 박병란 핀 꽃보다 피지 않은 멍울을 더 많이 담..

한줄 詩 2021.03.07

지금이 가장 좋다 - 손남숙

지금이 가장 좋다 - 손남숙 밤하늘이 한 발자국씩 이동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이 오고 있다 아득하던 오리온 별자리가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빛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고 지구는 돌아가고 우리의 이별은 차고 이지러지는 달처럼 자연스럽다 삼월의 마늘밭은 아침이면 더 푸르게 목을 늘일 것이다 저 계절에서 이 계절로 넘어온 깊은 물결 나의 남루함이 새로운 남루함을 걸친다 해도 따스하게 반겨야 할 얼굴이 있다 매일 달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듯이 어떤 계절에 걸쳐진 밝음은 어두운 숲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어쩌면 너의 가장 아름다울 시절이 여기에 나는 지금이 좋다 착하고 명랑하게 매일 눈뜨는 아침이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들판은 나의 것 - 손남숙 들판을 걸어갈 때면 주인이 누구든 논에..

한줄 詩 2021.03.07

지난번처럼 - 이산하

지난번처럼 - 이산하 제주도 예맨 난민문제로 강자의 숨은 발톱이 드러나고 약자를 추방시키는 국민청원에 수십만 명이 달려들 때 난 동유럽의 나치 강제수용소들을 성지순례 중이었다. 어느날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를 찾아 헤매다가 중앙광장 근처 거의 텅 빈 마트의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마트 유리문에 붙은 독일어 공고문을 친구가 번역해주었다. 친애하는 고객 여러분 어제 갑자기 갓난아기와 어린애들이 포함된 200여 명의 난민을 실은 버스들이 도착했습니다. 저희들은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매장의 모든 식료품들을 구호품으로 보냈습니다. 너무나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새로운 물품들은 이미 주문해놓았으며 거듭 양해를 바랍니다. 지난번처럼 고객 여러분의 마음을 믿습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한줄 詩 2021.03.07

다섯 번째 계절의 유장한 말씀 - 배정숙

다섯 번째 계절의 유장한 말씀 - 배정숙 찌그러진 양재기에 보조개가 파인다 양 볼이 살팍해지는 소리 귓볼이 경쾌하고 환승하여 혀끝이 배부르고 환승하여 식도가 따듯하고 다시 환승하여 심장이 환하고 가로등엔 불이 켜진다 목마르게 우러르는 저 은총의 젓가락이 납작 엎드린 밥숟가락위에 포옥 빛의 알을 슬어 얹는다 이런 것 저런 것 퉁 쳐 봐야 한 뼘의 궁리조차 번번이 도막 나 버리지만 그보다 더 기막힌 기사를 덮고 더 깊은 울음 밑으로 순순히 몸을 뉘는 이여 저녁 새참처럼 잠깐 스치는 역광이 재재거리며 지나가고 하루치의 수행을 요약한 빈 소주병이 불콰한 저물녘인데 여전히 자유의 눈알만 붉다 풀썩 어두워지던 밤이 드디어 코앞에서 주저앉는다 그러면 그 때는 필경 맞이할 내일의 이름을 신에게 물으리 턱을 괴고 고민하..

한줄 詩 2021.03.06

3월과 - 홍지호

3월과 - 홍지호 가을 같다고 했다 이미 잃어버린 자리라고도 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없었다 모두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 이라고도 했다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들리지 않는 비명이 너무 많았다 들리지 않아서 슬픈 노래와 비유를 바람이 보여주고 있었다 가벼워서 꽃잎이 가라앉는 것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가벼워져서 가벼워져서 가라앉지도 않으면 들어도 들어도 슬픈 노래를 들려줄게 가을 같다고 했다 곧 겨울이 올 것 같아서, 라고도 했다 *시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문학동네 수요일 - 홍지호 -환절기 단숨에 온 것으로 혼동하지만 서서히 도달한 모든 계절과 계절이 함께 머무는 거처에서는 구별이 어렵다 어느 계절의 손을 잡아야 할지 이맘때면 호흡이 어렵다..

한줄 詩 2021.03.06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 피재현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 피재현 자주 부음이 와 가을과 겨울 사이 봄과 가을 사이는 늘 그래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죽고 거래처 사장의 장모가 죽기도 해 가끔씩 부음이 오면, 한 생애가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잠깐 궁금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 보관함을 뒤져도 아버지 장례에 그들이 내 부의금을 확인하는 게 먼저야 그들의 조문을 기억하지 못하거든 장례 내내 나는 아버지가 미웠고 아버지가 불쌍했고 아버지가 슬펐거든 아직 겨울이 시작되지 않았어 유실수의 어깨에는 무거운 열매들이 얹혀 있고 아직 바람이 못 견디게 차지는 않아 사실 죽음이 그리 슬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려울 뿐 선친의 죽음이 그저 그런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사실은 그저 그런 일인데 우리도 그처럼 죽을 테고 난 좀 ..

한줄 詩 2021.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