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계관(鷄冠) - 김유석

계관(鷄冠) - 김유석 새장에 갇힌 새는 얼마쯤 시간이 흘러야 나는 법을 잊게 될까 새장의 새는 한동안 파닥거린다. 갇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창공과 새장은 공간의 차이 공간의 차이를 안과 밖의 문제로 바꾸는 것은 먹이 새의 깃과 새의 높이와 날아가는 방향이 깃든 먹이가 새장을 길들인다. 갇혔음을 알고도 새는 이따금 파닥거린다. 먹이를 찾는 습관이다. 가장 빠르게 창공을 버리고 귀화한 조류는 날지도 못하면서 푸드득거리는 종들 봉황의 볏을 달고도 날지 못하는 닭은 몸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기억을 잊어버린 까닭이다. 밖으로 날아간 새는 또 얼마큼 지나야 갇혔던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도서출판 상상인 유월 - 김유석 ​ 보리밥나무 열매 속으로 붉음이 스며든다. 붉음은 유..

한줄 詩 2021.02.02

만날 수 없는 사람 - 유병록

만날 수 없는 사람 - 유병록 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미워하므로 사과한다고 받아줄 마음도 없지만 그들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고 그러니 우리 부디 살아서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혼자 다짐하다가 만나고 싶은데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연락을 하면 전화를 받지 않거나 언제 한번 보자는 이야기만 하고 감감무소식 어쩌면 그들에게는 지독하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일 수 있겠구나 내가 그동안 지은 죄를 떠올려본다 우리 부디 살아서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나는 사과하지 않았고 사과한다 해도 받다줄 리 없으니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눈 오는 날의 결심 - 유병록 눈이 내린다 차갑고 포근하게 세상을 덮는다 누구든 용서할 수 있다면 아무도 죄를..

한줄 詩 2021.01.30

겨울 강가에 내리는 눈물 - 이철경

겨울 강가에 내리는 눈물 - 이철경 흐르는 물만이 기억하는 오래전 어느 해 겨울, 당신은 다시 오마 언약 후 안개 너머 사라졌네 흐르던 물길마저 세월에 지워지듯 해 뜨면 신기루 같은 이슬처럼 사무친 언약도 잊히고 말았네 뱃길 잃은 오래된 풍경 나룻배는 지워진 약속처럼 기억의 풍경에 머무를 뿐, 강변 갈대숲 사이를 떠날 줄 모르네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쳇바퀴 - 이철경 다뉴브강의 잔물결에서 사의 찬미 듣다가 그날이 오면 바람과 나에게로 설정된 오토리버스 기억의 저편에 저장된 한물간 노래가 다소곳이 담긴 어쭙잖은 희망 멀고 먼 공간 이동에 고단한 길, 빵조각 뿌리듯 되돌아가려면 중독된 노래보다 좋은 건 없다 마녀 사는 동네에 긴 시간 머물다 집으로 향하는 시간은 언제나 녹초 그래도 일상에 지쳐 ..

한줄 詩 2021.01.30

상실의 피그말리온 - 김희준

상실의 피그말리온 - 김희준 붓값이 없어서 그랬어 반지하는 오후의 결이 불온한 곳이었다 햇살의 단면이 울퉁불퉁한 곳에서 머리를 자르다가 스스스 소리에 엄마가 달려왔다 머리칼을 훔치자 어정쩡한 울음이 터졌다 갈라진 벽으로 햇살이 스며 들었다 얼굴은 마지막에 그리는 거야 새로 온 모델은 내가 좀 아는 여자였다 가운을 벗는 모양이 익숙했다 완만한 굴곡과 채도 높은 육체가 보였다 입술이 간지러웠다 토르소의 빈 젖을 빨다가 들켰던 미술 시간보다 더딘 벌을 받는 중이었다 그맘때쯤 여선생은 자주 엎드려줬다 흉상이 부서지는 상상을 하다가 붓을 놓쳤다 소리에 놀란 건 움츠러든 가운이 먼저였다 다시 들어가게 해 줘 엄마 형광등에 어깨가 녹았다 석고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피사체가 조명 앞에서 흘러내렸다 어디선가 유화냄새가..

한줄 詩 2021.01.30

극야 - 손석호

극야 - 손석호 태양의 인력에 묶여 있는 지구처럼 돈다, 팔아야 할 하루의 굴레를 굴리며 어제는 지는 해를 당기는 방향으로 오늘은 뜨는 해를 당기는 방향으로 낯선 우리에게 팔목 밴드와 우비를 팔고 익숙한 이웃인 양 건강과 날씨 얘기를 건넨다 때론 서먹하게 내가 내선 순환선일 때 그는 외선 순환선 교차하며 멀어진다 수십억 년 후에야 다시 스칠 행성처럼 자전이 계속되는 동안 밤과 낮 대신 세 번의 지상 구간과 지하 구간이 반복되는 2호선 공전궤도 그의 주름 속에도 오래된 기울기가 있고 견뎌야 할 위도가 높아 표정이 드러나는 지상 구간에선 백야처럼 창백해지고 지하 구간으로 급하강하며 어두워지는 얼굴 아무도 울지 못하게, 먼저 쇠바퀴가 터널에 비명을 지르며 별똥별을 뿌린다 저물어 공전궤도를 이탈하는 자전 어디쯤..

한줄 詩 2021.01.29

피로도시 - 조하은

피로도시 - 조하은 ​ 아침이 열리면 터널을 따라 수없이 돌고 도는 사내들 이 도시에는 넘어야 할 벽도 열어야 할 문도 많다 힘없는 자에게 벽은 벽일 뿐 문이 되지 않는다 벽 앞에서 문을 두드리거나 문 앞에서 벽을 두드리는 자 차갑고 무거운 것들 앞에서 아침과 저녁은 하나의 사선으로 읽힌다 두들기고 누르고 쥐어짜는 사각의 링에서는 시끄러운 다툼만 널브러져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터널에 갇힌 이들은 이곳으로부터의 탈출만이 꿈이다 손가락 마디만큼 빛의 구멍을 뚫어보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어둠뿐 웅크리고 스러지는 것들은 오늘을 해석할 수 없다 어딘가에 쉴 곳이 있으리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저 걷고 있는 투명인간의 행렬 흔들리는 생의 오타들 따뜻한 햇볕에 닿고 싶은 바람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한 사내가..

한줄 詩 2021.01.29

날 테면 날아보게 - 황동규

날 테면 날아보게 - 황동규 15년 전 일인가? 어느 가을날 모르는 사이에 날벌레 하나 눈 한가운데서 날았다. 아무리 해도, 정신 멍해지도록 눈 꽉 감았다 떠도, 내보낼 수 없어 신경을 내려놓았지, 날건 말건! 생각을 바꿨는지 딴청에 지쳤는지 첫눈 내릴 무렵 못 이기는 척 눈에서 나갔던 그가 며칠 전 돌아왔다. 끈질기에 나는 폼이 자리 도로 내달라는 것. 그간 나가 있어준 것만도 고맙긴 고맙네. 8년 전 겨울 동해 죽변항(竹邊港). 눈송이들 희끗희끗 춤추며 검은 물결에 몸 던지는 밤바다에 취해 2미터 넘는 축대에서 추락. 그때 등 근육 그러쥐고 비튼 통점, 등 오른편에 자리 잡고 나갔다 들어오고 들어왔다 나가고 자리 비운 때도 늘 거기가 켕기는데, 날벌레도 날던 곳에 와 날고 싶지 않겠는가? 발코니 식물..

한줄 詩 2021.01.29

무량한 나날 - 정일남

무량한 나날 - 정일남 많이 걸어왔다 발병이 나도 쉬어 갈 곳이 없다 날이 저물어 새가 날아가고 내 헛기침에 내가 놀란다 고독이 여물면 몇 줄 쓴다 이런 분위기에 낮은 데로 흐르는 물소리 울적할 때 휘파람을 불어본다 가난과 슬픔이 용서되어야 하고 만져지는 것보다 만질 수 없는 것이 소중한데 자정이 지나면 어둠의 먼 곳에서 동이 트이고 발자국 소리 들려온다 개미들이 줄을 이어 행군하는 아침 나팔소리 들리고 머물다 떠난 선현(先賢)들은 한결같이 고독과 명상에 아파한 사람들이었다 *시집/ 밤에 우는 새/ 계간문예 사각의 방 - 정일남 붉은 벽돌로 쌓은 사각의 벽 그 속에 같혀 여기까지 왔다 나는 가난을 자처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은 죄 시마(詩魔)에 홀려 같이 놀아난 죄 객지를 떠돌며 빈처(貧妻)에게 씻을 수 ..

한줄 詩 2021.01.28

한파 - 이돈형

한파 - 이돈형 강기슭은 누가 버리고 간 회의처럼 얼음에 닿아 있다 언 강은 폐쇄된 활주로, 수면을 문질러 술렁거리게 하였다 할 수 없는 일은 스스로에게 우호적이다 언 강에 갇힌 물오리는 할 수 없는 일, 그 일에서 벗어나려 한다 아마 환기되지 않는 절망이 죽은 회의가 물오리의 목일 것이다 길들여지고 품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횡단하려는 세계를 늦게 깨우칠 때가 있다 내일 봐요, 이처럼 쉬운 이별을 물오리는 1인 시위하듯 술렁임 밖으로 밀어낸다 걱정하는 사람들이 눈발처럼 날리고 남겨진 풍경이 빠르게 얼어 갔다 조심히 다녀와, 이 흔한 말은 언제나 물 건너간 기슭에서 반질거린다 길들여지기 좋은 날이다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걷는사람 기일 - 이돈형 내 기일을 안다면 그날은 혼술을 하겠..

한줄 詩 2021.01.28

거울 속 이사 - 김점용

거울 속 이사 - 김점용 용달차에 실린 화장거울이 눈발 속으로 달려간다 거꾸로 묶인 식탁의자 사이 벤자민 푸른 잎도 찰랑찰랑 딸려 간다 거울 속에도 펄펄 눈이 내린다 싸고 깨끗한 집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만리동 고개에서 마주쳤던 눈 날리는 눈송이 안이라도 따뜻한 방 한 칸 얻고 싶었는데, 부동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갈 힘이 없었다 그래, 다닥다닥 붙은 저 집들 속으로는 더 이상 들어가지 말자 고갯마루에 주저앉아 풀풀풀 날리는 눈발을 아득히 올려다보며 보이지 않는 먼 별자리를 새 주소로 삼고 싶었다 내 앞에서 나를 끌고 가는 저 화장거울은 한 집안의 살림살이 내력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어서 이사를 할 때마다 안과 밖을 비춰 보며 누추한 기억에 흔들렸을 거다 거울의 이쪽과 저쪽은 얼마나 멀까 지금의 바..

한줄 詩 2021.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