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끝내, 보이지 않는 - 김윤배

끝내, 보이지 않는 - 김윤배 당신은 개미자리와 바람의 불륜으로 태어난 연민의 꽃 광활한 대지를 버리고 남극, 그 극한의 얼음 왕국에 숨어 있는 꽃이다 사랑은 사라진 뒤에야 믿을 수 있는 환상이 분명하다 바람은 당신을 찾아 지구를 몇 바퀴나 순회하며 때로는 부드러운 미풍으로 이름을 불렀을 것이고 때로는 미친듯한 광풍으로 이름을 외쳤을 것인데 당신은 바람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 남극의 동토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꽃으로 숨으려 했던 것 숨어, 세상에 없는 꽃으로 피어나려 했던 것 당신은 극점의 사랑을 노래한다 보이지 않는 몸으로 보이지 않는 몸의 방향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 보이지 않는 입술이 보이지 않는 눈빛을 더듬어 찰나의 뜨거움이 남국에서 있었던 그날의 백야를 기억하는 건, 환상일 뿐이어서 끝내, 보..

한줄 詩 2021.02.05

입춘 - 안상학

입춘 - 안상학 몸도 마음도 청춘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나는 완전하게 죽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도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가고 누구도 내가 흘리는 눈물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나만 이 세상에서 나를 눕힐 방 한 칸 없는 것만 같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집이 있는 것만 같았다 어느 골목에서 바라보던 집들의 불빛은 딴 세상만 같았다 마음을 잃어버린 몸처럼 세상에서 나는 서러웠다 그때 내가 죽지 않았다면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았고 내가 부르는 노래는 누구도 듣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고 남들은 뭐든 다 있는 것만 같았다 옷을 벗고 미친 듯이 뛰어다닌들 누구 하나 돌아볼 것 같지 않았다 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세상에서 ..

한줄 詩 2021.02.05

유리 주사위 - 정현우

유리 주사위 - 정현우 두 눈은 울기 위해 만들어졌지, 인간은 가장 말랑한 슬픔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돌려도 주사위의 검은 눈이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 두 개의 눈동자 또는 7 죽은 이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내겐 운, 슬픔을 가진다는 것 또한 인간이 되기 위한 경우의 수, 천사는 생각해, 마음껏 울어도 돼 그래도 돼 얼마나 많은 슬픔을 깨뜨려야 사람이 인간이 될까 깨질 듯 굴러갈 듯 천사들이 사람을 줍고 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도화(桃花) - 정현우 * 칠월, 주인집 아저씨는 개를 잡았다. 사람들은 검둥이 눈을 보고 있었다. 도망가는 검둥이를 쫓는 사람들, 무더위가 뒤따라갔다. 그럴 거면 한번에 죽여버리지. 학교에서 배운 성선설을 중얼거리는데 앵두나무가 미친 듯이 붉은 눈동..

한줄 詩 2021.02.04

운명이라고 하기엔 - 여태천

운명이라고 하기엔 - 여태천 두 사람은 모든 시간을 나란히 누워 있었다.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그는 웃었다. 두 발을 창가에 올려놓고 조용히 눈을 맞추었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그는 울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서로의 얼굴을 보고 기도할 것을 맹세했다. 하얀 손이 때가 묻은 손을 잡았다. 떨리는 손을 젖은 손이 잡았다. 흔드리는 저녁 빛을 두 손이 오래 쥐고 있었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희망버스 - 여태천 망할 것처럼 폭설이 내리더니 오늘은 겨울비가 빈속을 후빈다. 주르륵 겨울비 오는 소리 툭 툭 투둑 투둑 겨울비 오는 소리 고장 난 장난감처럼 울고 있는 저 겨울을 읽을 수 없다. 세상은 허리처럼 아프고 애인같이 변덕스럽다. '세상은 외롭고 쓸쓸해'* 오래된 ..

한줄 詩 2021.02.04

한파주의보 - 전영관

한파주의보 - 전영관 지금 3월을 생각한다는 것은 미리 달려가 권태라는 벌을 받는 일 등마다 서릿발 무늬를 짊어진 겨울의 유민이 되어 봄 제국 앞에 입국심사를 기다려야 한다 동창의 불행을 소문내는 척 애틋하게 혹한을 설명하는 기상 캐스터의 짧은 원피스에서 이물감이 올라온다 불 꺼진 난로라도 보는 순간 손부터 꺼내는 습관을 잊을 때쯤 3월이 스민다 혼음하듯 외투에 매달린 악취들에서 번다함을 느낀다 한쪽으로 닳은 뒤축에서 생계의 편벽(便辟)을 동정한다 지난 달력의 기념일들을 옮기다가 꽃 따위에 대한 기대도 없이 3월에서 멈췄다 그날들을 더이상 표기하지 않을 때 소멸을 생각한다 버스에 탑승한 이상 언젠가는 하차해야만 한다 쌓아놓았던 나이를 다 뜯어먹은 노인마냥 폐허를 경유한 사람은 수긍의 기술을 안다 노숙인의..

한줄 詩 2021.02.04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 백인덕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 백인덕 담장 밖에서 밖으로만 그림자를 늘이는 나무는 안다. 몇 차례 돌팔매쯤 거뜬히 견디는 키 작은 관목조차 알고 있다. 시간은 철갑(鐵甲)을 둘러주거나 석회질 외투로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아님을. 밀어내는 힘과 억누르는 세상이 만났을 때 축축하고 질긴 외피로 자기 한계를 그을 때 금은 이내 상처가 되고 상처는 강이 되어 모든 뜻밖의 저녁 아래로 흐를 뿐이란 걸 시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온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뼈아픈 근황 - 백인덕 서 있는 내내 번갈아 저리는 다리 두 눈 꼭 감고도 추억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 무작정 내린 낯선 지명의 구도심 지하에도 지상에도 즐비한 곡(哭)소리 자진폐업, 임대문의, 점포정리, 핵폭탄세일의 반투명 유리벽을 유람하는데 순간 눈..

한줄 詩 2021.02.03

엄마는 그때 어디 있었어 - 피재현

엄마는 그때 어디 있었어 - 피재현 할머니가 나를 키워 줬어 두 주 전에 할머니를 잃은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누가 키웠나 자두나무 아래 상자를 놓고 올라서 붉은 자두를 향해 손을 뻗을 때 할머니는 내 손을 때렸지 엄마는 집에 없었지 나는 누가 이렇게 늙도록 키웠나 언 강에, 강물에, 바람에 지독하게 맵던 바람이라니 할머니는 봄바람이 귀찮다며 그만 죽어 버렸지 열아홉의 나는 봄바람처럼 울면서 국밥을 날랐지만 문상 온 친구들은 절도 잘 할 줄 몰랐어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나는 눈물을 훔치고 내일이 발인이야 우린 선산이 있어 제법 상례를 아는 체했지만 할머니가 나를 키워 주었어, 라고 말하지 않았어 문어를 더 달라는 친구를 힐끗 보았어 경멸과 연민의 짝짝이 눈으로 도대체 나는 누가 키웠나 키운 사..

한줄 詩 2021.02.03

밥솥 - 이강산

밥솥 - 이강산 모옥(茅屋) 한 채, 넷째 아들로 입양한 토끼의 생일 선물이다 두 살배기 토끼의 등 따스운 아랫목이고 밥솥이다 밥맛 좋은 날엔 슬금슬금 몇 숟가락 더 퍼먹고 밥솥 중턱에 유리창을 낸다 -밥솥에 숟가락 대지 마라 어머니의 금기를 어긴 나의 일탈을 엿본 게 분명하다 숟가락 자국을 지우기 위해 밥을 흩어놓는 모양도 나를 빼박았다 토끼보다 먼저 입양한 동쪽 호수, 가뭄 끝에 가까스로 물밥 지어낸 호수의 밥솥을 들여다보자면 금복주 병이며 낡은 군화의 흉터가 선명하다 십중팔구 식탐 강한 막내가 어머니 몰래 퍼먹은 숟가락 자국일 터, 그러나 밥맛이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금기를 깨뜨릴 수 있다면 나는 세상의 모든 밥솥을 열어보고 싶지만 밥솥이 없는 경우, 예컨데 청량리 588의 유리창에 호수처럼 고여있는..

한줄 詩 2021.02.03

그 달빛 아득했느니 - 김재룡

그 달빛 아득했느니 - 김재룡 남서능 끄트머리에서 시작하여 겨우 동북 주능으로 붙었을 때 이미 거리를 잴 수 없는 어둠의 저편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한 발자국 앞의 침침한 시선마저도 불연속적인 새소리와 함께 푸득인다 허기와 함께 달라붙는 거친 어둠의 숨소리 끝없이 달빛을 밀어내며 달빛이 질 때까지 또 다른 어둠에 접목되는 산 그의 허리 갑자기 움틀거리는 본능 어떤 짐승이 능선을 타거나 상봉에서 상상봉으로 오르는가 인간 아닌 어떤 짐승이 이 산의 정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는가 피투성이로 절룩이며 끌고 온 쫓기는 꿈을 계산 없이 드러내는가 뻘뻘거리며 원시림을 뚫고 나오다 문득 마주치던 몇 기의 돌무덤 산맥을 끌고 가는 별무리 부서지는 달빛 따라 꿈길처럼 이어지는 야간 산행의 한복판 이 산의 정상에..

한줄 詩 2021.02.02

이 땅의 시시포스 - 정기복

이 땅의 시시포스 - 정기복 시시포스가 신의 형벌이라면 이 땅의 택시 노동자는 소자본의 형벌이다 무너진 중산층의 가장 퇴출당한 지식 노동자 전문 기술을 익히지 못한 노동자가 쉽게 선택했다가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바퀴의 형벌이다 우리의 노동은 팔과 다리만을 사용하는 단순노동인 듯하나 긴장의 연속으로 뇌세포를 지워나가고 무릎도가니를 깎아내고 망막을 혹사시켜 시력을 잃어가는 하루 12시간, 주당 72시간, 한 달 만근 26일로 닳아가는 시간의 형벌이다 우리의 바퀴는 일 년이면 78,000km 지구 두 바퀴를 도는 긴 여정이나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였고 지구 세 바퀴씩 십 년을 돈다 하여도 요원한 휴식과 안식의 뺑뺑이인지 모른다 문명과 문명을 시공간으로 잇는 바퀴의 역할과 운명을 믿어 의심치 않으나 이 땅의 바..

한줄 詩 2021.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