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간헐한 사랑 - 안상학

간헐한 사랑 - 안상학 ​ 심장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시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퐁,퐁 솟는 샘이 그러하듯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간헐한 법이지요 꽃이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듯이 좀 길기는 하지만 우리 사랑도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는 것이 아닐는지요 ...전생과 이생과 내생... 한 번씩 말이지요 해가 간헐적으로 뜨고 지듯이 달이 간헐적으로 차고 이우듯이 사랑도 간헐적으로 틈틈이 사이사이 쉬었다 이었다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영원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간헐한 것이 아닐는지요 나는 요즘 언제 있었나 싶은 내 사랑이 간헐하게 이우는 소리는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북녘 거처 -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

한줄 詩 2021.02.26

사라지는 모든 것은 가장자리로부터 - 최세라

사라지는 모든 것은 가장자리로부터 - 최세라 나의 뒤에서 내리는 눈은 부작용 같은 하루를 떠메고 날아가는 긴 긴 어지러움​ 혀 밑에서 마이신 껍데기가 녹는다 잊은 꽃이 나타나기로 한 봄의 어귀까지 왔는데​ 하루만 살고 말 것처럼​ 사랑은 늘 어디까지 벗어 던질 수 있는가 묻기만 한다 부레를 삼키는 날들이다 물의 표면 어딘가 아슴푸레 불확실한 날들이다 물을 놓아주는 우수에 녹았던 것을 다시 얼리지 않아도 되는 우수에 홀씨를 가득 품은 흙들이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린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가장자리로부터 어깨를 움츠리고 보고만 있다​ 처음의 끝과 마지막의 시작들 차가운 얼음장 아래 살점이 허는 맥없는 물고기처럼 혀 밑에서 녹아 가는 온갖 약의 껍질들​ 언제쯤 뱉을 수 있을까요 곧 나에게 처방되지 않은 싸락눈이..

한줄 詩 2021.02.26

울음의 안감 - 정선희

울음의 안감 - 정선희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설익어 목소리가 갈라지는 울음이 있고, 색을 덧발라 속이 안 보이는 울음이 있고, 물기가 가득해서 수채화처럼 번지는 울음이 있다는 것을 어른이 우는 모습을 본 아이는 속으로 자란다 그날 호주머니의 구멍 난 안감처럼 울음은 움켜쥔 손아귀에서 허무하다는 걸 알아버린다 그 후 내가 만난 모든 울음은 그날 밤에 바느질된 듯 흐느끼며 이어져 있다 실밥을 당기면 주르륵 쏟아질 그날의 목록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다섯 여자가 모여 앉아 울음 같은 모닥불에 사연 하나씩 쬐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다른 사람, 몰랐던 사람이었다 관계란 아름답지 않은 한 줄 문장 같은 것을 붙잡고 있는 것 울음은 죽은 이에게 가지 않고 자신을 적시다 얼룩질 텐데 죽음을 당겨 울음의 안감..

한줄 詩 2021.02.23

아름다움에 대한 일고(一考) - 조성순

아름다움에 대한 일고(一考) - 조성순 히말라야 고산지대 산양 떼는 소금기를 찾아 벼랑을 헤맨다고 한다. 창공에 걸린 낮달을 배경으로 낭 끝에 우뚝 선 너를 보고 고독을 사랑하는 검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날 선 작두 위 무격이고 몸이 갈망하는 생존을 위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산길을 가다 웃고 있는 바람꽃이 곱다고만 하지 말아야겠다. 나날이 절박하고 하루하루 시시때때 존재의 창끝으로 격전을 치르고 있다. 뿌리에서 대궁까지 필생을 걸고 하늘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집/ 왼손을 위하여/ 천년의시작 화두(話頭) 만경대(萬景臺) - 조성순 하는 일마다 막히고 신세는 독 안에 갇힌 쥐 모양 진퇴유곡 비상구로 찾은 만경대 암릉 용암문에서 위문까지 하얗게 날선 바위들 피아노바위에선 머리를 조심하고 사랑바위에선 ..

한줄 詩 2021.02.23

잔설(殘雪)처럼 - 김재룡

잔설(殘雪)처럼 - 김재룡 끝 종소리와 함께 힘차게 날아오르며 세단뛰기를 하던 아이들이 신발 속으로 들어간 모래를 털고 교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철봉에 매달려 거꾸로 오르던 아이들도 현관 입구에서 신발을 털고 있었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몇몇 아이들이 바구니에 공을 주워 담고 있었다. 차디찬 한 올의 모래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아이가 두고 간 초록색 체육복 윗도리가 축구 골대 위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오늘 장사도 이렇게 끝났군. 뒤따라온 한기가 어깨를 짚었다. 성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 눈부시던 한 시대가 그렇게 갔다. 키 큰 나무들이 들어찬 숲이거나 논두렁 밭두렁으로 이어진 들판이거나 흐린 시선 맞닿은 아무데서나 몇 조각의 외로움들 뒹굴고 있다 언제나 열외에서 서..

한줄 詩 2021.02.22

선인장, 마흔 근처 - 전인식

선인장, 마흔 근처 - 전인식 잠깐 졸았을 뿐인데 눈 떠보니 사막 한가운데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 길인지 희미하다 분명한 것은 머리맡에 놓인 서너 개의 보따리들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모래언덕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 무거운 짐 싣고 갈 낙타는 꿈속에 보았던 동물 밤하늘 별빛 해독할 점성술을 익혔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쉬었다 갈 오아시스가 어느 쪽에 있는지 기러기 날아가는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알 수가 없다 바람이 등 떠미는 쪽으로 가면 행운이라도 따를까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 엄마와 아버지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왜 미리 사막 건너가는 법을 물어보지 않았는지 여태 정신 팔고 다녔던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호수 하나 만들고도 남았을 흘렸던 눈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간절하..

한줄 詩 2021.02.22

사랑의 뒷면 - 정현우

사랑의 뒷면 - 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외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컬러풀 - 정현우 옥상 문을 걸어 잠그고 밥을 먹었다. 멸치의 눈이 친구의 눈빛 같았다. 땅거미가 사람들을 갉아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투명한 가윗날 소리, 노을 ..

한줄 詩 2021.02.21

정처(定處) - 정일남

정처(定處) - 정일남 내가 없으면 나를 에워싼 만물은 의미가 없다 내가 있을 때 꽃은 피고 과일은 익어 굴러온다 나비는 날아와 어깨에 앉는다 나를 에워싸고 말을 걸어오던 부지기수들 나와 관계를 끊고 사계(四季) 밖으로 갈 것이다 미세물질은 허파를 갉아먹는다 몸의 반은 이미 흙으로 읽히고 두뇌의 반은 해골로 읽힌 지 오래 봉분에 바람꽃이 피어 손짓하게 되면 만 리 밖에서 무덤새는 날아와 꽃그늘에서 졸다 갈 것이다 마음속엔 동혈에서 흘러온 강물이 혼탁한 도시를 가로질러 간문(間門)을 흘러가게 될 것이다 *시집/ 밤에 우는 새/ 계간문예 무진 일기​ 1 - 정일남 문득 삼십 년 전으로 올라가 본다 민중시를 반 지하방에 엎드려 읽다가 어느 필화 사건에 휘말린 서정 시인이 아내가 떠나고 폐인이 되었다는 뉴스 홀..

한줄 詩 2021.02.21

낙타는 어제의 지도를 허물면서 간다 - 신표균

낙타는 어제의 지도를 허물면서 간다 - 신표균 나침반이 가리키지 못하는 사막의 길을 내비게이션은 손짓할 수 있을까 목마른 낙타 한 마리 오아시스 찾아 사막 속을 간다 눈썹에 매달리는 모래바람 마른 울음으로 헤치며 발걸음 다시 내딛지만 모래 속에 파묻힌 길이 어디로 닿아있는지 돌아갈 길 막막한 길 위에 서서 길을 묻는다 날개 부딪히는 일 없을 철새 떼가 날아가는 길 없는 그곳이나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눈엔 지도가 없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오늘/ 천년의시작 자정의 종소리는 종종 징징거린다 - 신표균 둥지도 무덤도 만들지 않는 눈먼 떠돌이 새들 동물원 안에 갇힌 매의 노란 눈에 놀라 검은 나비처럼 내 과거를 매장해 놓은 언덕 위를 날아다닌다 틀니 달그락거리는 소리 잦아든 귓속에서 자라는 침묵 아버..

한줄 詩 2021.02.21

까다로운 방문객 - 김점용

까다로운 방문객 - 김점용 묘지의 저녁이다 서둘러 청소를 할 시간 단청 꽃이 다 진 크고 낡은 집을 깨끗이 쓸고 또 닦아야 한다 어두워지면 발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집 오늘은 특별히 세 자매가 온다네 큰언니는 팔자를 그리며 나란한 무덤 두 개를 함께 돌자 그러고 둘째는 건넌방으로 사주를 보러 가자 자꾸 조르겠지 막내는 철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할 거야 저... 저기요, 당신 신발이 없어졌어요 찾아주세요 무엇이 잘못됐는지 밤늦도록 불은 켜지지 않고 혼자 빈 구석방을 오래오래 문지르면 사라진 꽃신들이 고요히 돋아나지 살아 있는 듯 살아 있는 듯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사람 비, 구름의 장화 - 김점용 밖에 좀 보거라 어젯밤에 너가부지가 마른 솔갱이를 한 짐 지고 안 왔드나 엊그제 커다..

한줄 詩 2021.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