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이 - 박구경

마루안 2021. 2. 17. 19:25

 

 

사이 - 박구경


들판 이쪽 저쪽으로 미루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잦은 기침으로 이파리 한두 개를 떨구며 겨우 서 있다

곧 거칠고 쓸쓸한 저녁 해가 곰골 뒤로 스러지고 말 것이다
지난 겨울 눈이 어깨에 쌓인 밤
눈썹에 쌓인 밤
떡국을 사러 나선 길에 치매로 세상을 마쳤다는 길갖집 소식을 듣고
전봇대처럼 박혀버린
들판 저쪽에서 새까만 철골 몇 개가 바람 소리를 치며 떨고 있다

철골 위에 눈썹이 앉아 있다
날개를 펴다 만 새 한마리가 앉아 있다
느닺없는 슬픔으로 오히려 내가 불쌍해지는 들판이다


*시집/ 외딴 저 집은 둥글다/ 실천문학사

 

 




도시락 - 박구경


이 눈물의 도시락을
간곡하게도 전언이니 다시 전하기를
납작 엎드린 길 너머론 구름이 어지럽게 흘러가고
바람은 멈추어 시커먼 나무 그림자 속에 있었다고 한다
동경에서부터 각혈 때문에
피난 나가지 못하는 다리로
자네는 꼭 살아남아야 한다고
살아서 다시 보자고
시간을 넘게 바라보고 바라보고
눈부처라 뒤돌아보며 헤어져야 했다고 한다
가다가 가다가 가기를
인생이 하루 종일 배고픈 일뿐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백팔십 리
총소리도 하나 없는 전쟁의 길가로 산허리로
쌕쌕이 가끔 지나가는 미루나무 무덤길
아무래도 더 있다가 먹어야 할 것 같아
밤을 새까맣게 새고 풀잎에 이슬이 걷히고도 한참
다리 옆에서 떡 파는 시모와 며느리를 보고서야
도랑물에 낯을 씻고 나서야
가다가 먹으라고 건네 준 보자기를 열었더니 에그머니!
넣어줄 찬이 없어 미안하다는 잘 쓴 글씨
굵고 삐둘한 그러고도 반듯한 만년필체에
두 다리가 딱 멈훠서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글자를 눈물로 파며
뭉치밥 반 인절미 하나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먹다가 해 질라 번뜩
나타난 누런 금가락지
나타난 금가락지
커다란 채마밭은 푸르기를 묵직한 금가락지!
구더기가 슨 장을 찍어 먹으며
얼마나 울고 또 울어댔는지 모른다고 했다
되돌아가야 하겠냐만
얼마만큼 되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도랑을 지나 작은 고샅을 휘둘러보고
사금파리 낀 담벼락 젖는 비의
산에 그이와의 오랜 얘기를 묻고 내려오는 산
어제 오십여 년 되돌아 내려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가슴이 쪼개질듯 하여
텅 빈 그 눈물의 도시락을
간곡하게도 전언이니 다시 전하기를


 

 

# 박구경 시인은 1956년 경남 산청 출생으로 1998년 제1회 전국 공무원문예대전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상 수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진료소가 있는 풍경>,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국수를 닮은 이야기>, <외딴 저 집은 둥글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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