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플랫이 붙은 어느 노동자의 악보 - 조우연

마루안 2021. 2. 15. 19:41

 

 

플랫이 붙은 어느 노동자의 악보 - 조우연 


그의 악보엔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명쾌하게 그를 연주해줄 바이올린 같은 여자도, 스타카토로 패배를 튕겨줄 아이도 없이 그는 지금 공사장 옆 전주콩나물국밥집에 혼자 앉아 저녁을 먹고 있다

 

뚝배기에 악보를 구겨 넣고 휘휘 젓는다 엉긴 노란 음표들이 고음으로 끓었다가 반음으로 가라앉는다. 좌로 좌로 반음씩 내려가다 보면 불 꺼진 그의 반지하 빈방이 나온다

 

기울어진 그의 음계는 단조롭기 짝이 없다 단조롭다는 것, 그 음울한 G단조의 반복 낡은 현악기처럼 구부러진 어깨 너머로 소주 한 병이 반주되고 있다

 

대가리가 두 쪽 난 사분음표 두어 개

얼마 전 추락한 십년지기는 덥다고 안전모를 쓰지 않았다

 

사는 데에는 따로 주법이 없다는 위안으로 막잔을 비운다 그는 조금 알레그로해진다 변박으로 피날레를 연주하며 콩나물국밥집을 나가는 콘트라베이스 손가락 현에서 담배연기가 낮고 긴 음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시집/ 폭우반점/ 문학의전당

 

 

 

 

 

 

문의 말 - 조우연

 

 

말발굽 하나 단 저 문을 말이라 할 수 있다

 

문은 어제 저녁 초원을 달려 겁먹은 양떼를 몰고 왔을지도, 고립된 자세로 보아 붉은 두건을 쓰고 야간 경마장 5번 트랙을 돌며 밤새 라흐마니노프를 울렸을지도 모른다

 

세워놓은 관 뚜껑 같은 문을 말의 긴 얼굴과
나머지 세 발목과

뭉개진 불안을 짊어진 등허리 어디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발목 하나로 앓는 환상통

앞발 하나를 들고 꽉 닫힌 말은 고독이 얼마나 아픈지 바닥 깊이 박혀 있다

냉장고 문에는 말발굽이 없다
차갑고 음울한 말의 얼굴뿐이다

주력을 상실한 말은 밤마다 속을 썩이며 웅웅 우는 소리를 낸다

철물점에서 노루발은 말발굽보다 네 배 싸다

 

가스검침원에 의해 발견된 옆집 남자의 긴 침묵

열린 문으로 실려 나가는 그의 발목이 다 썩어 있다

그는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을까


문 안에서도
문 밖에서도 고독한 말들


둥근 문의 반쪽에 말발굽을 달고 어둠의 반대편으로 달아나 버린 반달
바람에 삐걱거리는 반 남은 저 문을
오늘밤은 말이라 할 수 있다

허연 잇몸을 드러내고 웃는 저 달이
오늘밤은 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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