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장 먼 길 - 이산하

마루안 2021. 2. 18. 21:38

 

 

가장 먼 길 - 이산하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

숟가락이 밥 속으로
수직으로 푹 찔러 들어가
바닥을 긁고 나면
비로소 젓가락은 수평을 이룬다.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딘다.

나는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임을 깨닫는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바닥 - 이산하


누군가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봤다고 말할 때마다
누군가 인생의 바닥의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말할 때마다
오래전 두 번이나 투신자살에 실패했다가
수중 인명구조원으로 변신한 어느 목수의 얘기가 떠오른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강에 투신자살하면
거의 '99대 1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시신의 99%는 강물 속으로 가라앉다가 그대로 흘러가버리고
1%는 투신한 자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흘러간 시신은 강의 바닥까지 가라앉지 못한 시신이고
떠오른 시신은 강의 바닥까지 완전히 가라앉은 시신이란다.
물론 잠시 머문 뒤 떠내려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시신들은 한결 같이
반쯤 눈 감은 채 미소를 머금어 마치 불상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떤 생이든 막다른 벼랑에서 떨어져 바닥에 이르면
그곳이 정말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의 바닥이라면
관짝을 부수고 나온 부처의 맨발처럼 오히려 고요해질지도 모른다.
고요해지면 더이상 두렵거나 더이상 취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바닥을 쳤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멎는다.
물론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이르기도 전에 흘러간들
바닥을 치고 다시 떠올라 잠시 세상을 애도하고 흘러간들
시신을 염하고 운구하는 강물의 숨결은 한결같을 것이다.
언젠가 내 몸도 바닥에 이르지 못한 채 흘러가겠지만
언제나 가벼운 생일수록 바닥을 쳤다고 더욱 강조하겠지만
이제는 강물의 색깔만 봐도 수심을 안다는 목수의 말만큼은
바닥의 바닥을 치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을 믿는다.


 


# 이산하 시인은 1960년 경북 영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까다로운 방문객 - 김점용  (0) 2021.02.18
일몰 - 함명춘  (0) 2021.02.18
시간을 굽다 - 이강산  (0) 2021.02.17
사이 - 박구경  (0) 2021.02.17
내면에 든다 - 허림  (0) 202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