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장례식에 가서 - 이병률

마루안 2021. 2. 16. 21:53

 

 

나의 장례식에 가서 - 이병률


싸늘한 표정 없이 최대한 웃으려고 마음을 먹으며
나는 내 장례식장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보 위에 머리카락이 보여 쓰다듬듯 떼어내려는데
반투명의 비닐 테이블보 밑에 겹쳐서 깔아놓은
다른 테이블보에 들어 있는 머리카락,
차려진 음식 접시들을 이동시키고
테이블보를 살짝 들어 걷어내자니
하필 머리카락이 상 정중앙에 있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다 내린 다음
테이블보를 벗겨낼 수도 없고
접시로 그것을 가려놓자니
다음 자리를 생각하면 치워야 할 것 같고

돌에 돌이 박혀 있는 형국이다

내가 자리를 떠난 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괜찮지 않은 그것

나는 나에게 문상 가서
남의 머리카락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나는 살아 있을 때
검은색 위에 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잘 보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살아서
흰색 옷 위에 튀어나온 흰 실만 잘 보는 사람이었던가

중요한 거였다면 영혼이 알아서 물고 가는 법일 텐데
나는 이 머리카락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문상 가서 나의 끝은 어떤 모습일지 보려 하였다

바람이 가벼이 불어올 무렵이었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틀 - 이병률


치아가 이상해서 치과를 찾았더니
뭔가 참을 일이 많은 직업을 가졌냐고 묻는다

의사가 이에 실금이 많이 가 있다고 했다
왜 이렇게 윗니를 아랫니에 꽉 무느냐 했다

요즘 제가 참는 건 혀입니다, 라고 했더니
감정을 참느라 이가 성한 게 없다고 하였다

요즘 참는 건 돌아다니는 일이라고 내심 말을 바꾸려는데
어딜 좀 걸으면서라도 자기를 달래라고 하신다

잘 때도 이를 하도 꽉 물어서
어금니는 아예 닳았노라 했다

치아의 틀을 떠서 나에게 보이며
이에 쉼표라곤 없다고 설명했다

먹는 일 끝내고도
말하는 일 마치고도
쉬는 동안까지도 참아야 했다니

틀을 떠놨으니
제대로 참고해야겠는 일은

살아 있음을 참느라
생을 종잡을 수 없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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