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몰 - 함명춘

마루안 2021. 2. 18. 21:48

 

 

일몰 - 함명춘


일몰 직전이다

힘차게 뛰던 파도의 맥박이 조금씩 잦아들고

잠시 숨을 고르는 새 떼들이 허공에 못이 되어 박힌 채
지나왔던 길을 가만히 되돌아본다

참 탈도 많았던 길이었지 삶은

누구나 미처 다 읽지 못한 아픔의 책 한 권씩은 갖고 있는 거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각자의 하루에서 돌아온 물결들

하나둘씩 세상에서 가장한 편안한 잠을 준비하고

 

떠난 줄 알았던 적막이 그리움을 향해 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나뭇잎들을 어루만지며 수평선을 넘어온다

파도의 숨이 뚝 하고 끊긴다 일몰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부터 초심처럼 입술을 깨물며 별이 뜨고

아무것도, 더 이상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 다짐하며
바람이 분다

 

이제 밑도 끝도 없는 죄책감의 핀셋에 꽂혀 곤충처럼 버둥거리는
나를 그만 용서해 줘야지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조바심치고 괴로워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듯

어디선가 밥 짓는 저녁연기가 어머니의 손길처럼 피어오른다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천년의시작

 

 

 



인연 - 함명춘


태어난 時와 생김새
취향과 혈통, 사는 곳은 달라도
살아온 내력이 같으면
이렇게 한 번은 만나는 건가
이게 인연(因緣)이란 건가
전남 목포 유달산 정상에 오르자마자
느닷없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황혼에 발목이 푹 빠지는
성대 결절의 바람과
무릎까지 허리가 휜 소나무,
그리고 뭐 하나 이룬 것 없이
돌아온 외기러기와 나
그래, 우리 생의 팔 할은 울음이었고
목마름의 연속이었으니
끝없는 떠남과 돌아옴의
기나긴 여정이었으니

 

 


*시인의 말

인도에 간 적이 있다.
항상 낯설고 고행이라
그만 가야지 하면서도 또 가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게 다
행복이기 때문이다.

꼭 詩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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