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간을 굽다 - 이강산

마루안 2021. 2. 17. 19:36

 

 

시간을 굽다 - 이강산


속병 덕분에 방 한 칸 얻어 떠나와

맵고 짠 욕망과 인연은 그만 끓이겠다며 잠근 불판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깜박 침묵의 이불에 눕다 깨어보니

두 시 반이 아홉 시 반으로 익어버렸다

낮이 까맣게 타버렸다

방 가득,
공복의 마음 가득

시간의 누룽지 냄새가 매캐하다

 

타다 만 모퉁이 시간을 마저 굽고 긁어낸 누룽지가 지장암 석탑이다

백 년쯤 홀로 견딜 만하겠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멍게의 방 - 이강산


-살아있는 멍게 있습니다

 

4차선 횡단보도 곁, 깡마른 멍게 장수 사내의 목소리가 금방 구워낸 고구마 속처럼 뜨겁다
우수(雨水)의 밤이 염천이다

남도에서 예까지 맨발로 걸어온 듯

저 붉은 발가락들, 상처들, 모닥불처럼 끌어안고 견디는 객지의 하룻밤

저 횡단보도란

살아있는 호떡이며 살아있는 동태, 한때는 살아서 밤마다 서성대던 아버지까지 무수한 목숨들이 명멸했던
지상의 방 한 칸,

그 차디찬 주검의 구들에 누워 무사하려는지

떠나온 길을 기억만 한다면 사내 몰래 돌아갈 수 있으련만

사내는 분명 멍게의 추측보다 먼 길을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사내보다 멍게가 더 먼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저를 살리고 사내를 살리는 길이라는 판단으로

 

그럼에도 나는 이쯤에서 유랑을 접고 숙면에 들었으면 싶다

장돌뱅이 괴나리봇짐을 내려놓고 아버지가 떠났듯

손에 쥔 것 그만 풀어놓았으면 싶다

 

그러면 이 방에 든 목숨들을 무심히 스쳐 간 인간들이

하나둘 다가와 허리를 굽힐 것인즉,

 

-통영 멍게 있습니다

 

발가락의 상처가 아물었는지 사내가 멍게의 방문을 활짝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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