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의 알고리즘 - 정이경

마루안 2021. 2. 16. 21:59

 

 

슬픔의 알고리즘 - 정이경


여러 날 집을 비운 적 있다
하루에 한 번은 짧은 햇살이 작은 창에 머물고
바람이 몇 차례 드나들기도 했을 테지만
자른 무를 담아 두었던 주방 창문턱 유리그릇 물은 바싹 말랐고
보라색 무꽃을 피워낸 꽃대의 목은 꺾여 있었다
인기척 없는 집에서 어쩌면 스스로 사물이 되기로 하였는진 모르나
한동안은 혼자서라도
오롯이 살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생명이라는 그 가녀린 목숨을 붙들고

오래 아팠던,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남동생이
하늘로 갔다는 지인이 전한 부음
남은 가족들이 '있고, 없고'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과 함께
떨어져 살지만 건강한
나의 남동생이 오버랩되면서
수척해진 낯빛의 그녀를 미안하게 껴안는다
술잔들이 비워지고
식사를 끝내는 사이에도
어깨며 등 전체가 흐느끼는 장례식장

그러니
내 입술은 함부로 지껄이지 않기로 한다


*시집/ 비는 왜 음악이 되지 못하는 걸까/ 걷는사람

 

 

 



표면장력 - 정이경


꼬리뼈가 다 닳아 버린 지난밤의 태풍
새벽에 서너 차례 더
창문을 흔들고 갔다

알개실마을 남이 할머니 젖은 손에 딸려 온
자두 몇 알, 복송아 몇 개
트럭에 실려 온 사과 궤짝 옆에 쪼그려 앉아
끝물이 더 달다는 말은 입안에서만 풍기고
움푹 팬 눈에다 한나절을 들앉힌 채
지문이 사라진 앙상한 두 손은 오일장에 담겨 있네

장날이면 어김없이 문을 여는 천일식당
국밥 냄새는 온 장바닥을 적시며 파장 직전까지 가마솥에서 졸아드는데
기름진 국밥 배달되는지 물어볼까
돌아오는 장날
챙 넓은 모자 같은 거 한사코 손사래 칠 터
살그머니 내려놓고 모른 척 돌아설까

어느 구석에선가
한바탕 고함과 욕설이 씩씩거리다 슬그머니 사라진다
올려다본 허공에 미처 남은 물기를 훔치지 못한 바람이
구름의 정수리에서 쏟아지기 직전의 눈물처럼 바짝 매달려
늙은 생의 얼굴을 애써 쓰다듬네

길 건너 천막 제작소 옆
눈시울 더욱 붉어지는 배롱나무 한 그루
당신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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