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슬픔을 반으로 잘라 사과처럼 먹었다 - 김태완

슬픔을 반으로 잘라 사과처럼 먹었다 - 김태완 슬픔은 먹는 것이다 먹먹한 입 안으로 넣어 강물처럼 가슴으로 흘려보내듯 지나온 시간들이 인화된 사진처럼 압축된 순간이 될 때 그리운 기억은 눈으로 먹는 것이다 한 끼 밥이 주는 위안처럼 너를 위로하는 그 순간에도 눈물을 밀어넣는 손길에도 내 눈물이 너를 지키는 것이다 순간의 사실들이 모진 속도에 굴복할 때 곁을 지키는 뜨거운 슬픔을 키워내는 것이다 빈 방, 들어온 달빛 사람의 소리를 먹고 고즈넉하게 누워있는 자리 여백을 깔아놓고 너와 나 사이 아픔의 중력을 가늠하고 있다 이제 나를 꺼내주오, 이제 나를 가둬주오, 매일 문을 두드리는 이 변격의 슬픔, 모진 슬픔보다 더 깊은 슬픔은 둥근 형태인가 가만히 둥근 빛을 바닥에 뉘이고 그 은밀한 속살을 반으로 싹둑 잘..

한줄 詩 2021.03.03

안개는 끝나지 않았다 - 조하은

안개는 끝나지 않았다 - 조하은 어느 날 세상 끝 어딘가에 도착해 있으리라 생각했지 꼴 베던 논둑길을 지나 바람의 언덕에서 피리를 불었네 한 소녀를 향한 연정이 스치고 지나갔던 어떤 풀밭은 잠시 누워 있는 동안 빨리 사라지고 어디만큼 왔을까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돌아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네 연밥 안에 자리 잡은 단단한 씨앗처럼 다만 햇빛 아래 익어가고 싶었는데 주점 담벼락에 쏟아내던 세상을 향한 울분 위로 흐느끼는 한 사람 보내고 주저앉아 울어버렸네 세상은 온통 안개에 덮여 있고 얼음꽃은 오랫동안 녹지 않았다네 컨베이어 벨트에 빨려든 친구의 손에는 늘 릴케의 시집 가 들려 있었다네 목마름의 끝은 거기였냐고 묻고 싶은 밤이네 가득하고 싶던 삶은 텅 빈 채 끝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 지금 어디쯤 표류해 있..

한줄 詩 2021.03.02

외로운 이름들 - 여태천

외로운 이름들 - 여태천 전기를 읽을 때마다 궁금했어. 거미줄 같은 손금 촘촘한 무늬를 따라가면 마지막 이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생일날의 기분이라도 하루 일과를 끝내는 순서라도 떨어지는 별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늦도록 노래를 불렀겠지. 다시 어제의 일을 빼곡히 쓰게 한다면 뭐라고 적을까. 전기를 펼치면 모든 글자들은 바둑의 돌처럼 가지런하지. 한 사람의 일생이란 원래 사후적으로 완성되는 것. 그도 모르는 일들이 그의 전기가 되고 바람을 안고 비와 나눴던 시간은 온데간데없는 전기를 빨리 읽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해서 서툰 글씨로 이름을 수차례 적어 보지. 그래도 서운해서 쓸쓸한 이름을 나직이 불러 보지. 그러면 가로수의 잎처럼 가지런하게 생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곳에서 태어..

한줄 詩 2021.03.02

사랑이 그런 거라면 - 권지영

사랑이 그런 거라면 - 권지영 날이 선 당신의 말들은 내가 떠나기를 바라는 건가요 술에 취한 당신의 손은 내가 떠날까 두려운 건가요 사랑이 그런 거라면 나는 얼마나 더 모른 체 견뎌내야 하나요 서로에게 하는 말들이 깨진 거울이 되고도 어디까지 당신을 바라보고 어디까지 나를 내보내야 하나요 사랑이 그런 거라면 나는 얼마나 더 바보가 되어야 하나요 먼 데서 내려오는 눈송이들이 창밖으로 내민 손 위에서 쉬 사라져가네요 어쩌지 못하고 가는 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얼마나 더 사라져야 하나요 사랑이 그런 거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고독해져야 하나요 *시집/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 달아실 이별의 방정식 - 권지영 그와의 세계에서 안녕이라 했다 행복하세요 하나의 인연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 같은 말 대답은 서성이다 흘렀..

한줄 詩 2021.03.01

상흔 - 이철경

상흔 - 이철경 오래전 몽둥이로 서너 시간 넘게 죽음의 문턱까지 폭력에 노출된 적이 있다 높다란 미루나무가 픽픽 쓰러지고 자갈이 바위로 변하며 몸이 개미만 해지던 순간, K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강물로 뛰어들다 가라앉던 기억이 있다 실신한 채 물가로 끌려나와 한참을 방치됐다 머리는 여러 곳 터져서 피가 낭자하고 뙤약볕에 달궈진 자갈밭에 흘러나온 피가 말라 가던 시간 누군가 신고로 강 건너 경찰이 오고 왁자지껄한 순간 깨어났다 다시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강가에서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한 폭력에 팔이 부러지고 뇌진탕에 피를 많이 흘려 사흘 밤낮을 토하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지구가 빙빙 돌다 잠이 들면 멈추던 그때, 겨우 살아나 훗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원생 출신 외부인 K는 삼청교육대..

한줄 詩 2021.03.01

아무도 떠나지 않는 길 - 김윤배

아무도 떠나지 않는 길 - 김윤배 화사한 마음들은 어디론지 떠난다 길이 안개 속으로 휘고 상처 입은 사람들 마음이 철길에 물든다 떠나는 날의 슬픔보다 돌아오는 날의 통곡이 하산 길을 흐려놓을 걸 알아 아주 먼 여행 중인 혼령들, 몸에서 몸으로 하는 여행을 꿈꾼다 세상의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시작되는 여행은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이었고 몸은 지옥이었던 생의 의미를 놓고 숙려를 연장하지 않는다 사흘, 숙려기간은 지났다 숙려 장소는 냉동실이었다 십 년째 숙려 중인 젊은이는 사흘의 숙려가 부럽다 사흘 동안에도 꽃이 피고 철새가 돌아오고 아이가 태어나고 노동자가 벨트에 끼어 죽고 고공시위가 계속되고 사막은 어느 곳에서나 시작된다 함께 가기로 한 고비였다 사막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 초원을 달려나가는 여인, 양의 ..

한줄 詩 2021.02.28

가벼운 하루 - 김영희

가벼운 하루 - 김영희 오늘을 하루씩 늘려가는 것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커피 한 잔으로 잠 부스러기를 털어낸다 어느 작가의 생각을 몇 장 읽는다 무언가를 한 줄 써보려다 의미에 걸려 그냥 눕는다 한나절을 그냥 보내버린다 하릴없이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문을 연다 세상이 눈부셔 다시 문을 닫는다 오후의 등뼈는 앉아서 졸기 참 좋은 구조다 무언가를 덜어내려고 머리가 기울어진다 항아리 주둥이처럼, 입을 벌리고 졸아도 쏟아내지 못한 생각들이 차오른다 그냥 한 줄 써본다 이순 고개를 넘는 길은 카카오 톡의 알림 음처럼 바쁠 일도 없다 빛나는 일은 빛나는 사람들이 빛내고 있다 그리하여 가벼운 하루를 하루씩 늘려가는 것이다 *시집/ 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달아실 폐지 - 김영희 관절 마디를 착착 접으며 한..

한줄 詩 2021.02.28

만원 때문에 옆눈을 가지는 - 김대호

만원 때문에 옆눈을 가지는 - 김대호 아무리 자세히 봐도 바닥에 있는 것은 계산이 안 된다 작은 곤충의 세계 만원 때문에 옆눈을 가지는 바닥인의 사정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매 단추의 누추 바닥을 벗어나기 위해 매주 로또를 사는 일용직의 낡은 저녁 아무래도 계산할 수 없다 더하면 마이너스 통장이 나오고 빼면 절벽이 나오는 계산법 이 악랄한 계산법은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더 지독하다는 이론에서 시작되었다 이목구비를 제대로 갖춘 바닥은 없고 운명을 긍정하는 바닥도 본 적 없다 이 바닥은 다국적으로 평수가 넓어서 난민이 몰려든다 더럽고 누추한 것들이 아무렇게나 모여서 아름다운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어느 날 이런 장면을 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며 울었다 먹다 만 밥그릇이 식어 있었다 나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한줄 詩 2021.02.28

이젠 잊기로 해요 - 백인덕

이젠 잊기로 해요 - 백인덕 종이창 불빛 새는 어둑한 골목길을 내려와 늘 우리가 멈추고 떠나야 했던 우체국 앞 버스 종점 그대는 말아 쥔 신문을 흔들며 웃었지만 턱 낮은 언덕 하나 넘어가기도 전 나는 알았지. 가을 저녁 쓸쓸한 바람보다 먼저 비탈길을 올라 나중에 도착하는 종소리 나는 그대의 공명(共鳴)같은 사람이었음을. 성당으로 향한 나무 등걸에 기대어 그대를 쫓아 썰물로 밀려간 세상을 위해 축복하리. 성호를 긋고 돌아서면 나는 이내 물빛 고운 섬, 푸른 방 안에 갇히네. 갇혀 깃 작은 새가 되고 단 한 번 그대의 사람이 되어보지만 어느 날 더 높이 자랄 생을 위해 밤마다 제 잎을 버리는 검은 나무처럼 그대는 그대의 고단한 추억을 떨구리라. 나 영영 잊혀도 순간, 순간 잊힌대도 돌을 새기는 어리석음에 망..

한줄 詩 2021.02.27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 황동규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 황동규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다 지나가고 있네. 이제 엉덩이와 뒷다리만 남았어.' 낙상으로 누워 네가 말했지. 그런가? 하긴 우리 백 년의 엉덩이가 가파르긴 한 것 같아. 산책길을 반으로 줄였어도 몇 번인가 걸음 멈추고 숨 고르게 하거든. 내 전화 받아라. 산책 중이다. 내일부터 산책 다시 시작한다고? 아직 진달래 산수유 꾀꼬리는 없지만 네가 한때 입에 달고 산 노루귀는 소식도 없지만 흔친 않으나 노란 복수초들 얼굴 내밀고 공기의 맛이 전과 확연히 다르다. 네가 내일 너네 뒷동산에 오르면 너도 모르게 전과 다른 숨을 쉬고 있을 거다. 갈림길 만날 때마다 생각이 간질간질해지는 길을 걷다 보면 지난 한 세기의 엉덩이쯤 한번 걷어차보고 싶겠지. 뭐, 내 엉덩이라 생각하고 차겠..

한줄 詩 2021.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