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내 장례식에 오지 마라 - 김해동

내 장례식에 오지 마라 - 김해동 길바닥에 납작하게 눌린 고양이 말라붙은 주검을 시위하고 있다 누구나 한번은 세상 가장 슬픈 기호가 되어야 한다 삶이란 야생고양이처럼 세상 어디든 헤집고 다니다가 홀로 남겨졌을 때 언제 떠날지 모르는 차 밑에서 노심초사하다가 또 다른 차의 밑바닥으로 파고드는 것 함께해준 많은 시간들은 참으로 고마웠고 그 시간들 때문에 내 시간들을 채울 수 있었다 나는 내일 또 담장을 뛰어오를 것이고 한순간 헛디딘 발밑으로 천길 고요를 볼 것이다 내 장례식에 오지 마라 *시집/ 칼을 갈아 주는 남자/ 순수문학 그립다는 것은 - 김해동 그립다는 것은 실체가 없어도 스스로 충만해지는 것 그립다는 것은 가슴 속에 불덩이 하나 품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것 그립다는 것은 야생화를 뿌리채 뽑아 아무..

한줄 詩 2021.10.18

귀는 소리로 운다 - 천양희

귀는 소리로 운다 - 천양희 귀뚜라미 소리가 귀 뚫어, 귀 뚫어 우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귀를 닫고 산 까닭이다 네가 나를 견디는 동안 눈을 닦고 보아도 산빛은 어둡고 강물은 먼 데로만 흘러가 꽃 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는 비명 같아 귀에 한 세상 넣어주는 소리만이 침묵을 대신하는 유일한 문장이라고 쓰고는 하였다 어디서 오는 소리든 슬픈 소리는 눈으로 듣고 귀는 소리로 운다고 귀 뚫은 듯 귀 뚫은 듯 이렇게 자꾸 귀 기울여보는 것인데 나는 이제 다른 소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귀는 소리로 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어떤 충고 - 천양희 빗자루처럼 걸레처럼 살기 위해 집을 떠난다는 한 사람의 낮은 말을 들었을 때 문득 인도에서 만난 헐벗은 여자 거지가 생각났다 ..

한줄 詩 2021.10.18

얼음 조각 - 이규리

얼음 조각 - 이규리 축제는 축제를 견디려 종일 서 있었다 잠시 그들의 일부가 되어주기로 하였으므로 음악이 흐르고 불빛이 내리고 오늘 나는 잘 죽어야 한다 하루를 사는 일 이건 녹지 않으려 안간힘 쓰던 저들 삶과 얼마나 다를까 잠시를 영원으로 아는 눈먼 사람 말이네 모든 날들인 하루 그래 하루라는 건 결코 허한 시간이 아닌 거야 부재하고 싶었어 멸하고 싶었어 저 실상으로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목이 가늘어지지만 나는 서서히 사라져야 한다 어떻게 죽는 방식이 사는 이유가 되었니 카펫을 적시며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적막을 투명하다는 건 힘이 될 수 없지만 어떤 패도 지킬 수가 없지만 버티어온 힘으로 그러니 다시 고쳐서 말해보자 죽음이 이미 거기 있었으므로,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그리고 ..

한줄 詩 2021.10.17

달과 전봇대와 나 - 정철훈

달과 전봇대와 나 - 정철훈 도시는 빌딩마다 달이 켜져 있으니 그게 달인지 심통 맞은 알약인지 모르겠다 지금 눈에 보이는 달은 소화가 되지 않는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소화제라면 모를까 달이 전봇대 끝에 일직선으로 떠 있다 끝은 위태로워서 달도 위태롭다 달이 전봇대에 왔을 뿐 전봇대가 달에게 갈 리 없다 달이 위험하다 전봇대도 위험하다 둘 다 서로의 끝이므로 달이 전봇대 끝에 매달린 벌레집 같다 벌레집을 누가 파먹고 있다 달이 뜨지 않는 날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달이 되고 싶었다 일직선으로 가능한 게 있다면 달과 전봇대와 나였다 나는 그렇게 견딘다 먼지가 되기 위해 나에게 닿기 위해 *시집/ 가만히 깨어나 혼자/ 도서출판 b 그곳과 이곳 - 정철훈 내가 귀촌을 미루는 것은 그곳에서 노동을 ..

한줄 詩 2021.10.17

혼자가 연락했다 - 이문재

혼자가 연락했다 - 이문재 혼자가 연락했다 혼자가 먼저 신호를 보내왔다 우리가 모닝커피를 마시며 미팅할 때 밥상머리 교육 확대 방안에 관해 논할 때 세대 간 대화 촉진 지원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인류세의 미래를 주제로 한 국제회의에 참가할 때 혼자가 혼자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산책로 공원 광장을 늘려야 한다고 모든 공동주택의 설계 기준부터 바꿔야 한다고 거대 도시를 마을 공동체로 전환해야 한다고 외칠 때 전세계 기득권 세력의 완고한 프레임을 바꾸고 시민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감성적 담론을 마련할 때 그레타 툰베리 같은 청년들에게 부끄러워할 때 노년세대의 행동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모색할 때 지구 평균 기온 상승과 관련된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지구촌 모든 대통령궁 앞에서 치켜들 피켓을 고민할 때 양자역학과 저..

한줄 詩 2021.10.16

모호한 슬픔 - 박민혁

모호한 슬픔 - 박민혁 기다리는 전화가 있었나 봐요, 감추어 둔 희망을 들키는 기분 ​ 미래는 너무 많은 오늘을 약탈해 가고 있다 결국 너는 쥐가 난 슬픔 쥐가 난 왼손을 오른손으로 만졌을 때의 낯선 감촉 같은 거 이제 너는 공휴일에서 제외된 기념일 같다 한 여자애의 전화번호를 암기하는 일 너에게 없던 비립종 같은 걸 사랑하는 일 애인이 너의 이름을 발음할 때 멀미가 느껴지는 일 사랑은 왜 오전과 오후 사이에서만 기생하는지 이런 불가능한 시간이라니 운명이 뿌리고 간 겨우 한 자밤의 슬픔에 나는 이렇게도 엄살을 부리나 아직도 나, 내가 낳은 슬픔을 두고 훗배앓이 중 어쩔 건데, 이런 감정 ​ 모든 연애의 끝은 궁금한 궁금하지 않은 부모님의 굴욕 같은 거 나의 절망 역시 사행성이 짙습니다만, 누군가에게는 여..

한줄 詩 2021.10.16

나는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 김한규

나는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 김한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에는 주유소가 있고 주유소의 고객은 자동차라는 사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단순한 사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이미지는 서 있어야 하는 발바닥 때문에 멀리 있는가 전무님이 오시면 90도로 인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들으라는 사실이다 아웃소싱으로 단지 주유총이나 세차용 마포 걸레를 들고 있을 뿐인데 낮은 더웠고 밤은 추웠지 갈아입지 못하는 몸에 식어 버린 가루가 부서지고 모든 냄새는 기억을 만드는 장소였지 그랬을 뿐인데, 90도는 뭉개지라는 말이다 실제로 뭉개지지 않으면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거나 서 있는 발바닥을 인정하더라도 실패할 것이다 부어오른 길 위에서 짐승이 새끼를 낳고 있다 출처가 있는 것들이 되새김하는 대장에..

한줄 詩 2021.10.15

가로등 끄는 사람 - 이현승

가로등 끄는 사람 - 이현승 새벽 다섯시는 외로움과 피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 외로워서 냉장고를 열거나 관 속 같은 잠으로 다이빙을 해야 한다. 만약 외로운데 피곤하거나 피곤하지도 외롭지도 않다면 우리는 산책로의 가로등들이 동시에 꺼지는 것을 보거나 갑작스레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잠시 뒤엔 불 꺼져 깜깜한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암 환자가 보일 것이다. 구석으로 숨어든 어둠의 끄트머리를 할퀴는 고양이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외로움과 피곤과 배고픔과 살고 싶음이 집약된, 더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열정으로 고양된 새벽,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열정으로 살아 있는 다섯시 저기 어디 가로등을 끄는 사람이 있다. 고요히 다섯시의 눈을 감기는 사람이 있다. *시집/ 대답이고 부..

한줄 詩 2021.10.15

술과 잠 - 진창윤

술과 잠 - 진창윤 젖어들면 내 힘만으론 일어서기 어렵다 한 번쯤 나를 잊고 너를 잊고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야 빛난다 옷에 침을 흘리고도 단추가 풀어져서 웃을 수 있다 너와 나는 한 방에 마주 앉아 잘 다린 셔츠의 주름이 구겨져도 개의치 않고 꿈속인 듯 안갯속인 듯 흐릿한 눈빛으로 한세상 건넌다 계단을 오르던 무릎이 촛농처럼 흘러내려 켜켜이 쌓이면 서로의 손바닥을 겹쳐보기도 한다 너무 오래 잠겨 있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잊지 못하는 걸 잊어야 하는 게 인생 어둠이 내리는 방 눈꺼풀 닫고 검은 눈을 뜬다 검은 새는 밤하늘을 날기 위해 검은 것인가 봄날인데도 검은 옷을 입고 거리를 방황하는 흰 이빨들이 웃는다 *시집/ 달 칼라 현상소/ 여우난골 이불 - 진창윤 어둠 속으로 발을 밀어 넣는다 ..

한줄 詩 2021.10.12

비밀의 기분 - 고태관

비밀의 기분 - 고태관 만나기로 한 광장으로 갑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위험해요 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은 안전하니까요 우리는자꾸 어디로 가려고 해요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눈치챘다는 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 고개를 돌리다가 얼핏 봤어도 당장 어떻게 되는 건 아녜요 떠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묘지나 서점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오늘의 운세를 읽어 두세요 방향을 바꿔 북상하는 태풍이나 건물로 돌진하는 덤프트럭을 미리 겁내지 않게요 횡단보도로 건너면 되는데 가로수는 2차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입니다 그림자가 겹쳐집니다 고양이는 사람의 걸음만 보고 밥을 주는지 걷어차는지 알아요 긴 수염을 밟기도 하는데 멈추거나 넘어져요 갈고닦은 습관은 본능으로 진화합니다 아이를 앞세우고 당신이 걸어..

한줄 詩 202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