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귀는 소리로 운다 - 천양희

마루안 2021. 10. 18. 22:37

 

 

귀는 소리로 운다 - 천양희

 

 

귀뚜라미 소리가

귀 뚫어, 귀 뚫어 우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귀를 닫고 산 까닭이다

 

네가 나를 견디는 동안

눈을 닦고 보아도 산빛은 어둡고

강물은 먼 데로만 흘러가

꽃 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는 비명 같아

귀에 한 세상 넣어주는 소리만이

침묵을 대신하는 유일한 문장이라고 쓰고는 하였다

 

어디서 오는 소리든

슬픈 소리는 눈으로 듣고

귀는 소리로 운다고

귀 뚫은 듯 귀 뚫은 듯

이렇게 자꾸 귀 기울여보는 것인데

 

나는 이제

다른 소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귀는 소리로 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어떤 충고 - 천양희

 

 

빗자루처럼 걸레처럼 살기 위해

집을 떠난다는 한 사람의 낮은 말을 들었을 때

문득 인도에서 만난

헐벗은 여자 거지가 생각났다

 

"때로는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다 난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

 

내가 한푼 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바라나시의 여자 거지가 그렇게 충고했다

빗자루처럼 걸레처럼 살고 있는

사람의 충고 같았다

 

그 충고가 얼마나 센 바람인지

마음 하나 말 한마디 눈짓 하나가

내가 가진 것 전부일 때

가난하다고 줄 수 있는 게 없지는 않았다

 

줄 것이 있어 내가 따뜻하던 때

땅과 하늘과 구름과 나무가 다

어린 새와 풀벌레와 여치를 깨우고는

 

가난해서 아프지 말라고

차별 때문에 병들지 말라고

시련에 대해 한 문장 썼을 때

풀벌레 풀섶에 숨고

새도 여치도 울지 않던 저녁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는 여자 거지와

주머니에 돌을 넣고 강물에 뛰어든 여자 작가가

어떤 충고처럼

나의 비망록

끝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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