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는 소리로 운다 - 천양희
귀뚜라미 소리가
귀 뚫어, 귀 뚫어 우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귀를 닫고 산 까닭이다
네가 나를 견디는 동안
눈을 닦고 보아도 산빛은 어둡고
강물은 먼 데로만 흘러가
꽃 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는 비명 같아
귀에 한 세상 넣어주는 소리만이
침묵을 대신하는 유일한 문장이라고 쓰고는 하였다
어디서 오는 소리든
슬픈 소리는 눈으로 듣고
귀는 소리로 운다고
귀 뚫은 듯 귀 뚫은 듯
이렇게 자꾸 귀 기울여보는 것인데
나는 이제
다른 소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귀는 소리로 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어떤 충고 - 천양희
빗자루처럼 걸레처럼 살기 위해
집을 떠난다는 한 사람의 낮은 말을 들었을 때
문득 인도에서 만난
헐벗은 여자 거지가 생각났다
"때로는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다 난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
내가 한푼 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바라나시의 여자 거지가 그렇게 충고했다
빗자루처럼 걸레처럼 살고 있는
사람의 충고 같았다
그 충고가 얼마나 센 바람인지
마음 하나 말 한마디 눈짓 하나가
내가 가진 것 전부일 때
가난하다고 줄 수 있는 게 없지는 않았다
줄 것이 있어 내가 따뜻하던 때
땅과 하늘과 구름과 나무가 다
어린 새와 풀벌레와 여치를 깨우고는
가난해서 아프지 말라고
차별 때문에 병들지 말라고
시련에 대해 한 문장 썼을 때
풀벌레 풀섶에 숨고
새도 여치도 울지 않던 저녁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는 여자 거지와
주머니에 돌을 넣고 강물에 뛰어든 여자 작가가
어떤 충고처럼
나의 비망록
끝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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