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밀의 기분 - 고태관

마루안 2021. 10. 12. 21:56

 

 

비밀의 기분 - 고태관

 

 

만나기로 한 광장으로 갑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위험해요

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은 안전하니까요

 

우리는자꾸 어디로 가려고 해요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눈치챘다는 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

고개를 돌리다가 얼핏 봤어도

당장 어떻게 되는 건 아녜요

떠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묘지나 서점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오늘의 운세를 읽어 두세요

방향을 바꿔 북상하는 태풍이나

건물로 돌진하는 덤프트럭을 미리 겁내지 않게요

 

횡단보도로 건너면 되는데

가로수는 2차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입니다

그림자가 겹쳐집니다

 

고양이는 사람의 걸음만 보고

밥을 주는지 걷어차는지 알아요

긴 수염을 밟기도 하는데 멈추거나 넘어져요

갈고닦은 습관은 본능으로 진화합니다

 

아이를 앞세우고 당신이 걸어옵니다

넘어지려는 아이를 두 팔로 안아 올립니다

 

 

*시집/ 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 걷는사람

 

 

 

 

 

 

녹색광선 - 고태관

 

 

지구본도 어지러운 날이 있지

아마존 숲을 빠져나오느라 그런 거야

 

불시착한 사막은 건조해

날개뼈가 가려워

짧은 팔이 닿지 않네

여기가 아니라면 다음에는 먼지로 태어나고 싶어

 

노을을 셔벗으로 핥아볼 수 있게

늦은 오후에 와 줄래

배가 고파지는 6시는 이른 저녁일까 늦은 오후일까

지평선 위에서는 노을이 길어지니까

10분 더 기다려 줄게

대신 우리가 다녔던 거리 이름을 잊으면 안 돼

저기 신기루로 펼쳐진 수평선까지 산책 다녀올게

 

어느 골목에서 네가 그랬지

굴러가다가 멈추는 돌멩이는 전생을 보고 있는 거래

 

등이 가려워 깨어난 새벽

나를 안으려다가 돌아누워 잠든 네 등을 만져 봤어

돌멩이도 그럴듯해 여기만 아니라면

 

새벽이 오고 다시 아침으로 와도

너를 마중 나가는 모래 폭풍으로 흘러넘칠게

 

다시 만나면 나를 주머니에 넣어 줘

돌멩이가 되어 네 꿈을 꾸고 있을게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로등 끄는 사람 - 이현승  (0) 2021.10.15
술과 잠 - 진창윤  (0) 2021.10.12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 박지웅  (0) 2021.10.11
오늘 바람이 불면 바람꽃 피어 - 유기택  (0) 2021.10.11
바람꽃 - 김용태  (0) 202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