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아현동 가구거리 3 - 전장석

아현동 가구거리 3 - 전장석 도무지 기분을 맞출 수 없는 동네가 있다 사람들 하루 종일 북적이다가 쓰레기 더미처럼 새벽이면 다소곳한 동네 불쑥 석류알 붉은 잇몸을 내미는 동네 반짝하던 불빛만큼 반색하는 늘 그 모습이라서 강의 묏등으로 출렁이던 노래 표정 밖으로 기분이 흘러들면 설탕을 듬뿍 묻힌 빵처럼 부풀어 올라 그 동네와 가끔 친해지고 싶어 골목을 서성이다 보면 나는 그 동네를 잘 아는 사람 그러다가 더 꼼꼼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나라면 비 오는 가구거리 천막 아래서 가구들의 자세와 나이를 묻고 싶어져 오늘은 정말 무엇이든 축축해져서 고양이 발자국도 흉터가 되는 사람에게 바닥까지 내려간 얼굴은 기분이 만든 천성 때문이라고 말하지 그를 경유해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면 임대 딱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가구거..

한줄 詩 2021.09.30

전생 - 홍성식

전생 - 홍성식 먼지라고 했다 아니, 저건 먼저 떠난 사람들의 눈물이야 사막이라고 했다 천만에, 길을 잃은 자들의 당혹일 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내 별의 고리를 보았다 아버지가 보낸 추기경들이 진노했다 비밀을 발설한 자는 손톱이 뽑혔다 삼십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생일 할머니의 쪽진 머리칼은 더디게 색을 잃어갔다 육만 마리 낙타의 주인인 그녀의 아들 마흔여섯 총독들은 달마다 조공을 바쳤다 목소리 굵은 이웃 별 사신이 오던 날 먼지 속에 떠 있던 헤픈 여자들이 웃었다 망측하게도 일처다부가 보편인 별 아버지는 엄마라는 호칭을 경멸했다 할머니는 아들만을 사랑한다고 했다 둘의 다툼 앞에서 나는 오줌을 지렸다 깨어나지 못할 토성에서의 꿈.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출생의 비밀 - 홍성식 범선으로 요하네..

한줄 詩 2021.09.29

그러니까 내 말은 - 김상출

그러니까 내 말은 - 김상출 눈물이 흘러나오는 길을 따라 그 안쪽 끝까정 들어가보믄 거기 분명 작은 읍내에 어울릴 법한 이쁜 간이우체국 하나 있을 거여 자네가 이래 몇 날 며칠 우는 거는 거기서 자꼬 슬픈 편지를 쓰고 있는 누가 반드시 있는 거여, 하믄 그러니께 내 말은 말이여 자네도 이렇게 자꼬 우지만 말고 거기로 편지를 쓰라 이거여 인자, 편지 고만 보내라고 울 만큼 울어서 눈물 다 말라부렀다고 또 머이냐 인자는 나도 좀 살아야 쓰것다고 아 언능 쓰란 말이여 *시집/ 다른 오늘/ 한티재 세월을 만나다 2 - 김상출 마루에 놓인 빈 박스는 서너 켜 더 올라가 있고 우편함에는 오랜만에 KT 요금고지서가 담겼다 늙은 개는 짖어보려고 두어 번 목을 추스리다 그만둔다 주인은 보이지 않고 이웃집 벽을 타고 오르..

한줄 詩 2021.09.29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 손진은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 손진은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알겠다 병에도 위계가 있다는 걸 사막의 사자처럼 센 놈이 늑골언덕 깊숙이 사무치면 위아래서 빼꼼히 얼굴 내밀던 치들은 얼른 엎드린다는 걸 그러다 그 정든 병 유순해질 즈음이면 꼬리뼈에 핏줄에 마음의 살들에 숨어 살던 밀사들 얼른 고갤 들어 세력 다툰다는 걸 때로 다른 불우의 습격에 스러져 간 놈들, 내 영토는 버려진 마음들과 병이 암수가 되어 식구를 들이고 곁에 눕고 몸을 내줬다는 걸 지금도 엑스레이를 보면 내 몸의 왕국 점령하고 나부끼며 쇠락해 갔던, 때로 통보도 없이 왔다 간 환후의 연혁 아련히 남아 있다는 걸 그런 줄도 모르고 많은 미망과 헛것에 골몰했던 불모의 영지에 파란만장 술과 국밥, 울음과 다정 흘려보냈던 목구멍의 뻔뻔함! 오오래 병과..

한줄 詩 2021.09.28

봄볕이 짧다 - 김영진

봄볕이 짧다 - 김영진 ​ 눈동자 스민 황달 이제 얼굴 덮쳤다 예순넷까지 삶 언덕 가팔랐고 병원 중환자실로 실려오기 전날까지 자활 공공근로로 쓰레기 치웠다 외래진료 받아도 출근 거른 적 없던 분 댁을 찾아가 이층 단칸방 문 두드렸다 홀로 조용히 떠나도록 한사코 가만 두라 했으나 방 안에 그냥 둘 수 없어 구급차 불렀다 병실 유리창으로 달려드는 봄볕, 기운 없는 손을 잡고 이마 머리카락 넘겨드린다 혼자 살아오신 삶, 유일하게 연락 닿는 남동생에게 알리지 말라 부탁하셨지만 그 말씀 들어드릴 수 없었다 기운 내세요 이겨 내셔야죠 물으니 아주머니 샛노랗게 웃으신다 병실 비춘 봄볕이 짧다 *시집/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문의/ 문학의전당 철근 인생 - 김영진 ​ 어릴 적 넝마 덮고 자란 그이 뼈마디는 철근마냥 굵고 ..

한줄 詩 2021.09.28

한낮 - 육근상

한낮 - 육근상 대밭에 흰 새 울다 날아갔다 천둥 번개 불러들인 대추나무도 슬퍼하였다 강 마을 들어서는 샛길은 또랑 만들어 며칠 수근거렸다 땡볕이 채마밭에 날개짓 털었다 마루턱 기대 댓잎이 쓰는 글 몇 줄 읽다 받아쓸 요량으로 고쳐 앉으면 풀잎은 강물 소리로 흔들리다 울음 터뜨렸다 마루가 걸을 때마다 슬픈 노래로 찌걱거리자 고욤나무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늘 뒤란에 뿌려놓았다 마당이 바람도 없는 한낮이라 눈부시게 적막하였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볕 - 육근상 품속 같다 무엇이든 끌어안고 있으면 한 생명 얻을 수 있겠다 겨우내 버려두었던 텃밭도 품속 따뜻했는지 연두가 기지개다 뽀족한 입술 가진 호미도 헛바닥 넓은 꽃삽도 품속 그리웠는지 입술 묻고 뗄 줄 모른다 나를 품었던 엄니도 이제 품속 돌아가려는지 양..

한줄 詩 2021.09.27

먼저 된 사람 - 김한규

먼저 된 사람 - 김한규 형은 먼저 형이 되었다 마마가 어린 몸을 먼저 지나갔다 남겨진 자국에 죽어 갈 날이 하루씩 파고들었다 동생은 형의 동생이 아니라고 했다 아랫목에서 식고 있는 밥그릇이 넘어지고 먼저 될 수밖에 없었던 형은 눈이 파묻은 취한 발을 끌며 집으로 오고 있었다 기미가 없는 봄이 꺼멓게 멍든 뼈를 드러냈다 얼어붙은 발은 끝까지 팔을 움켜쥐고 기다리지 않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얼마 남지 않은 날에 파먹을 수 있는 것은 다 파먹고 달력도 없이 넘어가는 얼굴을 벽 속에 묻었다 먼저 되고 만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거두는 눈길을 먼저 거두었다 다 거둔 얼굴에 죽은 새의 날개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동생은 형의 동생이 아니었으면 좋았다 눈과 함께 어서 가 버리는 이월이었으면 좋았다 다시 ..

한줄 詩 2021.09.27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 두껍습니다 이 밤은 유독 내 몫이 아니었던 생들이 무더기로 돋아 방 한칸의 벽을 이룬 듯한 이 밤은 뚫고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우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여 우리는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일상은 폭력없이 평화로웠나요? 차별없이 따뜻했나요?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너희가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할 수 있었나요? 우리 손으로 미래를 목 조르고 있지는 않았나요? 내 손이 판 무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마스크에 쓴 시 13 - 김선우 1 어쩔 수 없이 빌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빌려 쓸 수밖에 없는데 돌려줄 수 없어서 존재의 슬픔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들이. 실은, 함부로 빼앗은 것들이 더 많습니다. 이..

한줄 詩 2021.09.27

너무 낭만적이거나 너무 실용적이거나 - 임후남

너무 낭만적이거나 너무 실용적이거나 - 임후남 가까이 숲이 있으면 좋겠어 상추 심을 텃밭이 있어야지 수국 한 그루 심을 정원도 있음 좋겠어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으면 좋겠어 지하철역은 가까워야겠지 그래도 조용한 곳이었음 좋겠어 실용과 낭만이 부딪치는 사이 욕망과 현실이 끓는 사이 집도 아닌 방 한 칸, 꿈은 너무나 비현실적 이 색에서 저 색으로 수국 한 그루 변덕스럽게 피고 지는 사이 하이힐 신고 산책하는 사이 *시집/ 전화번호를 세탁소에 맡기다/ 북인 나무와 몸 사이 - 임후남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걸었다 그림자가 함께 걸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그대로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눈은 온몸으로 나를 받는다 다정한 눈길은 내가 걸어갔다 오는 사이 어지러워졌다 늙어가는 동안 내 육체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생각..

한줄 詩 2021.09.26

뒤를 돌아보는 저녁 - 천양희

뒤를 돌아보는 저녁 - 천양희 길을 가다가 가끔씩 뒤를 돌아본다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내려 잘못된 것은 없나 뒤를 살펴보는 인디언처럼 두고 온 무엇이 있기라도 한 듯 뒤를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다 뒤돌아보는 나는 지금 뒤편의 그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일이 나를 돌아볼 때처럼 어둑하다 내가 혼자가 되다니,,,,, 돌아보면 나는 나 자신을 추스른 것이다 세상에 할 기억이 많아 진퇴양난을 겪기도 한 모양이다 가던 길 돌아보다 세상 참 더럽게 시끄럽네, 참을 수 없을 때 물속에 비친 달빛 같은 정화론(淨和論) 한편 쓸 수 있겠다 나는 오랫동안 한길 가기를 원했으므로 지금은 오래 뒤를 돌아보는 저녁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그늘에 기대다 - 천양희 나무에 기대어 쉴 때 나를 ..

한줄 詩 2021.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