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 박지웅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 박지웅 당신을 보내고 종유석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먼 동굴이 되었다 말문 한번 여는 데 천년만년 걸리는 입이 되었다 내 입속에 먼길이 생겼다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입안은 다만 내생(來生)과 연결되어 있다 먼 훗날에도 오지 않을 먼먼 훗날에 이 쓸쓸함은 발견되리라 목울대에 희미하게 비치는 한 방울 유골, 한 알의 누(淚) 똑, 똑 떨어진 바윗물은 흰 어금니가 된다 캄캄한 잇몸에 아물지 못한 말들이 자라고 자라 한 겹 한 겹, 솟을새김 올리는 액체의 뼈 동굴 천장바닥에 맺혀 글썽이는 눈알들 당신의 늑골에도 눈감지 못한 것들이 이리 자라는가 한 방울의 전생(前生)을 데리고 와 한 방울의 전생(前生) 위에 내려놓는 일을 나는 사랑했으니 입속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목록을 헤아리는 가을이 북..

한줄 詩 2021.10.11

오늘 바람이 불면 바람꽃 피어 - 유기택

오늘 바람이 불면 바람꽃 피어 - 유기택 지금 창밖에는 봄비 듣고 오늘 꽃이 불면 어떡하지 벼락같이,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제로 나를 만날 수 있는 날들이 하루가 줄었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면 미처 다 저물지 못하는 오늘로 그만이다 이 별에서의 작별은 늘, 오늘에 멈춰 있다 어제는 없고 내일은 언제나 너무 멀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꽃이 된다 지금은 손톱물 지두화 같은 바람꽃의 시절 수만 번의 손톱자국을 꽃잎으로 새기면서 오늘은 창백한 꽃물이 듣는 바람꽃이 핀다 나도바람꽃을 마지막 세우고 손톱 갈퀴 같은 바람 속에서도 꽃은 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매일 나는 오늘 또다시 어디서든 하염없이 멀다 지금도 밖에는 바람꽃이 불고 우리에게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줄곧 밖으로만 열..

한줄 詩 2021.10.11

바람꽃 - 김용태

바람꽃 - 김용태 날선 감정들도 세월 속에선 모두 다 풍화를 겪는 것인지 그러다가 하루에도 수만 번씩 감정은 물비늘처럼 흔들려 가지 않겠노라며 다짐해 놓고도 가만히 손 넣어 보면 어느덧 모질지 못한 마음은 그대에게로 가 있고 늘 기다려 맞던 그 곳으로 허망한 발길은 버릇처럼 향한다 한 때는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두었던 사람 훗날, 어느 생 어느 별에선가 만나도 낯설지 않을 얼굴 뜨거운 이름이었던가 모든 별들 바람에 쓸리어 간 자리마다 하나 둘 당신 얼굴 바람꽃 되어 피어나 밤이면 밤마다 하늘가에 다가고픈 간절한 마음은 삼백예순날 가슴에서 그댈 비워낸 날이 없었다 말없이 그렇게 당신 보내고 살구나무 꽃 그림자 어른거리는 밤이 오면 난 문둥이처럼 서러워져 두 무릎 껴안고 자전하는 지구의 소리를 들어야만 ..

한줄 詩 2021.10.11

노을 지게 - 하외숙

노을 지게 - 하외숙 그가 평생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이삭 팬 보리처럼 깔끄러운 자식들 타관으로 떠나보내고 밭장다리로 남대문 시장 비좁은 계단 오르내리는 사이 꽃이 피는지 잎이 지는지 청춘은 돌개바람처럼 휘리릭 지나갔다 작달막한 키 짓누르는 등짐 앞에 지겟작대기 하나로 버텼을, 그가 바닥을 치고 일어설 때마다 종아리에 푸른 힘줄 돋을새김하고 절뚝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가 지게를 닮아 가는지 지게가 그를 닮아 가는지 굽은 등에서 뻗어 나온 지겟가지 양쪽 어깨 착 달라붙어 내려놓지 못하는 굴레 구부정한 등에 노을 한 짐 지고 허우적허우적 걸어간다 *시집/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 시와반시 개망초 - 하외숙 소소한 바람에 자주 흔들렸네 망할 망으로 태어나 망친 날도 많았네 바람을 ..

한줄 詩 2021.10.10

발광고지(發狂高地) - 서윤후

발광고지(發狂高地) - 서윤후 버려진 산소호흡기를 핥다가 어린 고양이 입김 서리는 것을 본다 무언가 닦아내면 어떤 것이 사라질 것만 같다 이를 모든 것이라고 부르는 아른거림만이 유일한 궁금증 또, 또 지리멸렬한 날씨 무너진 성곽이 더이상 관여하지 않는 잘 닦아놓은 미래가 있었다 모두가 돌아오게 되는 반환점으로 숨 쉬는 것을 가여워하게 되는 전개를 펼치고 그 사이사이의 안개 오리무중의 발진이다 창광하는 밤벌레들처럼 거리로 나온 아침 인간의 얼굴을 구경한다 전망할 수 없는 표정들에 휩싸여 있으면 어린 고양이의 숨 같은 건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다 또, 또 어두워지려는 심장 들리지 않는 것을 어둡게 하면 꿈 밖으로 나와 소리치는 빛 환호는 환희의 별미라도 되는 듯이 인간을 재주넘는 (영혼, 마음 다음에 생각나는..

한줄 詩 2021.10.10

천문의 즐거움 - 김선우

천문의 즐거움 - 김선우 ​ 하늘을 오래 바라보다 알게 되었다 별들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것들이 어찌어찌 모여서 새로운 별들로 태어난다는 거 숨결에 그림자가 있다는 거 당신도 나도 그렇게 왔다는 거 우리가 하나씩의 우주라는 거 ​ 수백억광년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른 빛의 내음 소리의 촉감 온갖 원자들의 맛 ​ 지구에서 살아가는 나는 가끔 죽은 지 오래인 별들의 임종게를 발굴해 옮겨 쓴다 ​ 그대들이 세상이라 믿는 세상이여, 나를 받아라. 내가 그쪽을 먼저 사양하기 전에. ​ 오늘 아침 닦아준 그림자에서 흘러나온 말 임종게가 늘 탄생게로 연결되는 건 아닐 테지만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들이 있어 우주가 지나치게 쓸쓸하진 않았다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티끌이 티끌에게 - 김선우 -작아지기로..

한줄 詩 2021.10.10

서쪽에서 부는 바람 - 박상봉

서쪽에서 부는 바람 - 박상봉 때로는 서쪽에서 바람이 불기도 한다 바람이 하는 일은 나무의 잔가지를 흔드는 것이지만 한뭉치 댓바람이 불어와 나무둥치를 흔들거나 뿌리째 뽑아놓고 가기도 한다 더러는 바람에 가슴이 베일 때가 있다 깊이 파인 상처와 그만큼의 흉터를 남기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우기가 다가오는 기미를 먼저 알리는 것도 바람의 일이다 바람이 한바탕 구름을 몰고 올 때가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나는 좋아한다 나 대신 울어주는 비바람이 고맙기 때문이다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 곰곰나루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 박상봉 갈수록 이명이 들린다 미처 알아듣지 못한 말 남겨둬야겠기에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나무에 박인 옹이 같은 것들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나중에 꺼내 볼 요량으로 넣어둔 ..

한줄 詩 2021.10.09

과녁은 빗나가거나 묘미를 찾거나 - 김지헌

과녁은 빗나가거나 묘미를 찾거나 - 김지헌 목표물을 살짝 비켜갈 때 이미 빈틈은 뒤통수를 보이고 말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도 이미 빗나간 화살이 관통한 곳 목표지점에서 빗나가는 것이 생의 묘미라는 듯 생각도 말도 자꾸만 과녁을 비껴가 엉뚱한 곳에 꽂힌다 타클라마칸의 오지 여행가처럼 검은 고비의 길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모래 위에 지문 하나 남기지 않고 애초의 과녁은 잊은 채 허밍을 날리며 돌아온 적이 있다 어디에도 나의 단서를 드러내지 않았다 저녁 식탁에서 당신과 내가 같은 석양을 바라보게 될 줄 몰랐듯이 지금 여기는 어쩌다 빗겨 간 우연 대륙 어딘가에서는 폭우가 마을을 삼키고 가족을 뿔뿔이 해체시키며 악마의 혀를 날름거리지만 지금 나의 빗소리는 애인의 손가락처럼 섬세한 맛 해체와 몽상 사이에서 ..

한줄 詩 2021.10.09

줄에 관한 생각 - 박주하

줄에 관한 생각 - 박주하 거문고에 줄이 없었다면 누가 줄을 튕겨 심연을 건드려 보았을까 어미가 줄을 놓아 주었으니 새끼도 그 줄을 타고 지상에 발을 들였겠지 탯줄을 감고 노래 부르고 탯줄을 타고 춤을 추고 한 올 한 올 서로를 튕겨주는 믿음으로 즐거웠으나 약속에 매달리고 관계에 매달리며 그 줄 점점 얇아지고 가늘어졌으니 돌아갈 길이 멀고도 아득하여라 몸으로 엮었던 줄을 마음이 지워 버렸네 서로에게 낡고 희미해져 먼지처럼 가늘어진 사람들 요양원의 투명한 링거줄에 매달려 있네 잃어버린 첫 줄을 생각하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가을비가 내리는 동안 - 박주하 비가 내리자 잔이 차오른다 잔을 비우면 다시 비가 내렸다 술잔을 풍등처럼 쥐었다 쥐었다가 놓고 놓았다가 쥐는 술잔이 입술과 소원을..

한줄 詩 2021.10.08

음지식물 - 최서림

음지식물 - 최서림 아직도 연탄을 때는, 연탄재처럼 사위어버린 둘째 형을 생각하다가 눈물이 찔끔 나왔다 펑펑 울어 보고파 울음통을 두들기고 두드려봤지만 텅, 텅, 빈 소리만 흘러나왔다. 중학을 마치고 고물상으로 들어가 망망대해 서울살이를 향한 돛을 올렸다. 음지식물 같은 여자를 만나 외떡잎 닮은 아이를 낳았다. 택시기사, 배달원, 경비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이 불량품 돛이 금방 다 부서져버렸다. 외떡잎 아이마저 떡깔나무 숲에 뿌린 후 조카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삭아버린 항구 같은 엄마가 해마다 설 추석이면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버스정류장에서 '독한 놈, 나쁜 놈' 중얼거리면서도 흐릿한 눈으로 내리는 사람마다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시집/ 가벼워진다는 것/ 현대시학사 가벼워진다는 것 - 최..

한줄 詩 2021.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