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술과 잠 - 진창윤

마루안 2021. 10. 12. 22:05

 

 

술과 잠 - 진창윤

 

 

젖어들면 내 힘만으론 일어서기 어렵다

한 번쯤 나를 잊고

너를 잊고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야 빛난다

옷에 침을 흘리고도

단추가 풀어져서

웃을 수 있다

 

너와 나는 한 방에 마주 앉아 잘 다린 셔츠의 주름이 구겨져도 개의치 않고

꿈속인 듯 안갯속인 듯 흐릿한 눈빛으로 한세상 건넌다

 

계단을 오르던 무릎이 촛농처럼 흘러내려 켜켜이 쌓이면

서로의 손바닥을 겹쳐보기도 한다

 

너무 오래 잠겨 있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잊지 못하는 걸 잊어야 하는 게 인생

 

어둠이 내리는 방

눈꺼풀 닫고 검은 눈을 뜬다

검은 새는 밤하늘을 날기 위해 검은 것인가

 

봄날인데도 검은 옷을 입고 거리를 방황하는

흰 이빨들이 웃는다

 

 

*시집/ 달 칼라 현상소/ 여우난골

 

 

 

 

 

 

이불 - 진창윤


어둠 속으로 발을 밀어 넣는다
잠깐 데워진다

이불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자지를 잡고 곤한 잠을 청하는 어머니의 밤은 짧아지고
밤공기를 데워 저녁을 기다리던 골목은 휘어지고

이불 속 물살은 잔잔해
어둠은 심심하고 어둠은 눈물처럼 짜

불 끄고 달팽이처럼 웅크려 음악을 듣는 아이, 그 누가 불러도 들리지 않아
이불은 아이를 낳고 웃음과 울음을 발명하고

발톱을 꿈틀거려 하릴없이 더듬는 밤, 체위를 바꿔도 항문 속으로 감춘 꼬리가 단단해 우리는 대형 난로를 지피고도 두꺼운 이불을 편다
입버릇처럼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발목을 다독이며 주문을 외운다

창밖은 빙하,
공룡처럼 문 두드리는 아버지의 발걸음
아무리 추워도 발 뻗고 자야 하는 건 이불 속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는 할아버지의 외침 때문
대를 이어 씩씩하게 행군하는 가시철망 때문

네 개였다가 두 개였다가
너와 나는 이불 속에서 껌벅거리며 그리움을 파먹는다
가지런히 누워 붕어처럼 뒤꿈치의 무늬를 맞춘다

 

 

 

 

*시인의 말

 

미끄러지는 제자리 뛰기,

잠들다 깨어나는 혀의 잠꼬대.

깜깜한 방에 누워 있다.

 

멍하니 방문을 쳐다보다가 동글동글

낯선 의자에 끼어 배 까고 등 비빈다.

 

나는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며 꼬리를 흔들었으나

분홍 입술 하나 피우지 못하였다.

 

나를 닮았으나 내 말을 듣지 않는, 차마 떼지 못한 말들이

불 꺼진 골목 자동차 바퀴 밑으로 기어 들어가

얼룩 고양이처럼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