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로등 끄는 사람 - 이현승

마루안 2021. 10. 15. 22:09

 

 

가로등 끄는 사람 - 이현승


새벽 다섯시는 외로움과 피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
외로워서 냉장고를 열거나
관 속 같은 잠으로 다이빙을 해야 한다.

만약 외로운데 피곤하거나
피곤하지도 외롭지도 않다면 우리는
산책로의 가로등들이 동시에 꺼지는 것을 보거나
갑작스레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잠시 뒤엔 불 꺼져 깜깜한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암 환자가 보일 것이다.
구석으로 숨어든 어둠의 끄트머리를 할퀴는 고양이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외로움과 피곤과 배고픔과 살고 싶음이 집약된,
더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열정으로 고양된 새벽,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열정으로 살아 있는 다섯시
저기 어디 가로등을 끄는 사람이 있다.
고요히 다섯시의 눈을 감기는 사람이 있다.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슬리퍼 - 이현승


꿈에 신발을 잃어버렸다.
익숙한 식당에 우르르 가서 먹은 점심이었는데,
꿈이란 이상도 하지. 익숙한 식당인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우르르 가서 먹었는데, 정확하게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내 신발만 없었다. 두세 번 신발장을 뒤져도 나오지 않자
곧 바로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너무 식상한 꿈이잖아.
그래도 우르르 몰려나가는 사람들의 뒤꽁무니만 보다가
남겨지는 기분은 별로여서 진짜 신발을 잃어버린 것처럼 언짢았다.

도대체 어떤 원만한 분이 남의 신발을 신고 간 것일까.
도대체 어떤 사람의 말 못할 이유가 내 발을 묶어 놓은 것일까.
훔쳐간 것이 아니라면 결국 한 켤레의 구두는 남겨질 테지.
식당주인이 내민 욕실용 슬리퍼를 신고 서서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꿈속에 붙들려 있어야만 하는 걸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찾아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벌써부터 꿈밖에선 언제까지 잠을 잘 거냐고 야단인데
남겨진 구두 주인들의 식사는 끝없이 이어지고

앉아서 기다리시라는 주인의 말을 한사코 밀쳐두고서
나는 왜 이렇게 붙들려 신발장을 지키고 있는지
나는 왜 신발 지키는 사람의 자세로 누워 있는지
나는 언제부터 머리는 꿈에 두고 발은 이렇게 한데 두고 있는지

 

 

 

 

# 이현승 시인은 1973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원광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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