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이발사의 세번째 가위 - 박지웅

이발사의 세번째 가위 - 박지웅 평생 남의 뒤에서 살았다 이발사는 뒤에서 웃는 직업이다 이발소로 흘러든 것이 구름이라도 깍듯이 대접한다 등 굽은 이발사는 낙타 뼈로 깎은 빗과 세번째 가위를 들고 벽에 길게 덮인 거울로 들어간다 대개 구름은 희미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머리칼을 칠 때마다 약간의 물소리가 빠져나간다 손님과의 대화는 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가위는 은빛 날개를 한 비행기처럼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그때마다 구름은 머리채 부드럽게 흔들며 눈을 가늘게 뜬다 가죽 의자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듯하지만 이발 보자기 걷으면 구름은 어느새 걷히고 없다 뭉클하게 잘려나간 것을 쓸어모으면 바닥에 낙타처럼 웅크린 것들은 파랗게 눈뜬다 일찍이 이발사는 부모가 솜구름을 타 이불 속에 숨기는 것을 알았다 ..

한줄 詩 2021.10.30

죽는 것도 개운할 때 - 이성배

죽는 것도 개운할 때 - 이성배 들깨 송이가 까맣게 익는 사이 산도 사람도 까슬까슬해졌다. 풋내 나던 봄과 뜨거웠던 여름은 뒤란 항아리 속에서 더디게 익는 중이고 잘 말린 고추는 자식들 수만큼 나누어 놓았고 늙은 호박은 나눠줄 식구들보다 넉넉하다. 농사는 모자란 것도 남는 것도 없지만 다행히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골목에서 마주친 노인들은 서로 자기 집으로 저녁 가자며 소매를 잡는다. 그만하면, 이만하면 되었지 뭐. 이맘때는 죽는 것도 개운하다.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고두미 소일거리 - 이성배 회관 앞 평상에 마을 노인들 나와 있다. 며칠 전부터 슬몃슬몃 다음 계절이 비치던 자리 진한 자줏빛 꽃잎 여러 폭 두른 목단꽃 새초롬하니 노르스름한 애기똥풀꽃 아직도 서럽고 서러운 꽃며느리밥풀 ..

한줄 詩 2021.10.28

국수 - 강건늘

국수 - 강건늘 퇴근길 가랑비와 함께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가난한 아버지들의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비처럼 한쪽 어깨는 사선으로 기울고 시한부 진단을 받고 나오는 사람처럼 헐거운 양복 헐거운 우산 헐거운 버스에 겨우 오른다 뾰족구두가 꾸욱 발을 밟고 지나간다 미안하단 말도 없이 언제나 그렇듯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둥 하나를 겨우 잡고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데 그럼 어쩌나 무얼 해서 먹고 사나 부모님 얼굴은 어찌 보나 그럼 어쩌나 그럼 어쩌나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드는데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허기는 찾아와 국수를 끓인다 하얀 소면이 끓고 착하디착한 연약한 국수를 따듯한 국물에 말아 후룩 후룩 후루루 후루루 아 기운이 좀 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조금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

한줄 詩 2021.10.28

나의 마지막 가을 - 황동규

나의 마지막 가을 - 황동규 이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조그만 산골 절터, 내가 마지막 가을을 보낼 곳은 여기다. 성긴 풀밭에 검은 주춧돌들 아무렇지 않게 뒹굴고 각자 자기 곡선 그리며 내린 낙엽들이 잔바람에 이 구석에 몰렸다 저 구석에 몰렸다 하는 빈터. 산새 하나 부리가 시린 듯 짧게 짧게 울다 말다 한다. 적막(寂寞) 같은 건 없다. 늦가을 저녁, 남은 햇빛 속에 우박이 와르르 풀밭에 튕기며 환하게 내리고 이 빠진 가사로 옛 노래 흥얼대다 우박 맞고 얼얼해져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곳.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제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물으시겠는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화양계곡의 아침 - 황동규 지난밤 여러 사람과 꽤 마셔댔으니 말빚 많이 졌겠지 자갈들이 서로 살갗 ..

한줄 詩 2021.10.28

마음을 담는다 - 정세훈

마음을 담는다 - 정세훈 곡기를 끊은 지 나흘 된 애완 노견 몽실이가 내 눈에 무언의 제 눈을 맞춘다 하루 종일 눈을 감고 사경을 헤매다가 간혹 나를 바라보며 가깝고도 머나먼 눈을 고요히 맞춘다 사랑했다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죽어서도 살아 사랑하겠다고 모든 생 마치고 가는 눈물 젖은 늙은 눈동자 그 어느 팔팔했을 적 총명했던 눈망울보다 더 뜨거운 눈 맞춤으로 물 한 방울조차 거부하는 주검의 길 가는 그 길을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나의 마음을 고이, 담는다 *시집/ 동면/ 도서출판 b 가을 아침 - 정세훈 그리운 사람이 그리운 가을 아침 새벽 일터로 나가기 위해 아침 때 이른 신을 신는다 어느새 꼿꼿하던 내 등은 굽었다 신도 등이 굽듯 낡았다 등을 구부리지 않고 꼿꼿하게 편 채로 신을 탁탁 꺾어 신..

한줄 詩 2021.10.27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 김윤환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 김윤환 노을을 슬퍼하는 진짜 이유는 잔광(殘光)이 동굴을 향해 들어가는 어린아이의 눈동자처럼 보였기 때문이야 맑고 푸른 아침을 내 것처럼 으스대지 말 걸 그랬어 오후가 가까울수록 쓸쓸한 시간 꽃은 지고 향기도 말라 아무 것도 건져 올 수 없는 이승의 벌판 꽃술에 취해 반복되는 노을이 마침내 동굴에 자리를 편다 산 채로 불붙어가는 흰 나방의 꿈 하늘의 별이 아니라 어둠의 별이 되고 싶었지 동굴의 눈(眼)이 되고 싶었지 마치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이석증(耳石症) - 김윤환 뿌리 없는 돌 하나 귀청에 들어와 발걸음 뗄 때마다 세상을 흔드는데 아침 새소리나 나비의 날갯소리를 듣고자 했던 고요는 사라지고 막혀버린 출구 분주한 고함소리에..

한줄 詩 2021.10.27

나무라기엔 늦은 - 김진규

나무라기엔 늦은 - 김진규 그늘이 흩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 밑에 앉아 나뭇잎들을 바라본다 이 계절을 떠나는 것들은 모두 소리가 있어 한번이라도 귓가에 머문 것들은 쓸어담을 수도 없이 어딘가에 쌓여간다 햇빛은 수많은 시간을 지나고 지나서 내 발 언저리에 구르는 얼룩이 된다 이끼가 돋은 나무를 타고 오르는 개미떼 저것들은 언젠가 자신에게도 돋아날 죽음의 징후들을 알고 있을까 이를테면 맞대고 살아온 시간의 색을 푸른 것도 아닌, 검은 것도 아닌 그저 살색이라고 말하는 내가 개미떼를 바라본다 문득 아비의 피부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와 아비의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 나는 단지 예감할 뿐이다 그가 누리던 수많은 시간과 이야기들 그 모든 걸 나르던 바람을 나는 만난 적 있던가 이따금 이명처럼 찾아오는 밤을 견디다가 ..

한줄 詩 2021.10.27

음악이 있다면 영원히 - 정경훈

음악이 있다면 영원히 - 정경훈 그렇게나 예뻤던 가을에 낙엽처럼 울상이었던 사람 두르지 못한 살을 그리워하는 그 사람, 뼈만 걸치고는 춤을 춘다 그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그를 아끼고, 굵다가 앙상해진 어깨를 타고, 흘러 흘러 세계는 동질이 된다 그는 오래 삭힌 홍어를 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나는 짧게 들은 콧노래와 융합되어 그의 음악을 삼킨다 가을의 독서가 일제의 잔재라면 가을의 음악은 무엇의 제국이란 말인가 무엇의 의미를 찾다가 울상으로부터 일그러진다 낙엽의 짓거리는 파동이, 그 사람을 애쓰게 한다 *시집/ 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 문학의전당 마로니에 공원 - 정경훈 비둘기가 고개를 둘러대고 있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고 그렇게 뒤를 돌아보면 비둘기는 백색이었다 날아오른다 말끔하게 바..

한줄 詩 2021.10.26

징검다리 버튼 - 김영진

징검다리 버튼 - 김영진 ​ 소식 알 길 없던 이와 다시 만나 걸으니 마음도 붉다 어금니 앙다문 날 많아 꺾인 사랑 잊은 지 오래 새로운 일이 느티나무 잎만큼 무성히 자랐다 안부 물을 일 없이 지내온 삶 그러다 오늘, 서로 배낭 멘 채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쳤다 "시간 흘러도 그대로네"로 시작한 이야기, 말이 오솔길 따라 오르내렸다 다른 길 지나왔어도 물길은 서로 만나고 그때로 돌아갈 일 없어도 지나갈 다리 놓을 때 있다 계곡 저편으로 건널 징검다리 시선 둔 채 흔들리는 가지처럼 잠시 서성였다 발 디디면 현실로 돌아가는 저 돌다리 버튼, 우리보다 노을이 먼저 밟고 지나갔다 *시집/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문의/ 문학의전당 곱으로 갚아줄 궁리하다가 - 김영진 ​ 넌 모자라다는 말 수화기 건너왔다 힘껏 살아온 ..

한줄 詩 2021.10.26

종이꽃 - 임경남

종이꽃 - 임경남 사막을 건너왔어요 모래바람을 타고 내가 하는 말은 하도 서걱거려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일 년에 한두 번 온다는 비를 기다린 적도 있지만 뿌리를 내리는 대신 떠도는 법을 익혔지요 한 번도 젖을 물린 적 없는 내 몸은 종이꽃 헛물관을 타고나는 바람에 푸른 잎맥만 무성했어요 건조증이 심한 날은 온몸이 가려워 밤새도록 비듬을 긁어모아 일기를 쓰기도 했는데 문장마다 잔물결이 일어 쉬이 읽어낼 수가 없었어요 여전히 달(月)마다 꽃잎 청구서는 날아들고요 내 몸은 바람을 찢고 온 건기에 시달렸어요 사막에서도 꽃이 피네요 외로움도 간이 배어 세상의 안부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 저만치 잘 다듬은 눈물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던 걸요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북인 능소화 흘..

한줄 詩 2021.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