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 - 이강산 그 가을, 나는 모과 도둑으로 살았다 어느 외딴집의 모과에 콩깍지가 씌었던 것이다 두어 차례 모과나무 곁에서 집을 향해 인기척을 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문틈으로 누워있는 노파가 보였을 뿐이다 나는 노파를 못 본 척, 모과 둘을 땄다 모과의 색에 빠져 남자가 다가서는 줄 몰랐다 모과 나무에게 다소곳이 모과를 돌려주고, 남자의 완장을 덥석 받아 들고, 나는 이듬해 가을쯤 완장을 벗을 줄 알았다 가을에 모과나무는 베어지고 없었다 모과의 사타구니에 욕창이 생기도록 따지도, 줍지도 않던 남자였다 노파의 닫힌 문처럼 모과나무를 벤 까닭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나처럼 완장을 찬 사람이거나 아예 모과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떤 절명의 칼날이 모과나무를 쓰러뜨렸을 것이다 남자 몰래 불온한 상상만 했다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