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혼자가 연락했다 - 이문재

마루안 2021. 10. 16. 19:39

 

 

혼자가 연락했다 - 이문재

 

 

혼자가 연락했다

혼자가 먼저 신호를 보내왔다

우리가 모닝커피를 마시며 미팅할 때

밥상머리 교육 확대 방안에 관해 논할 때

세대 간 대화 촉진 지원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인류세의 미래를 주제로 한 국제회의에 참가할 때

혼자가 혼자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산책로 공원 광장을 늘려야 한다고

모든 공동주택의 설계 기준부터 바꿔야 한다고

거대 도시를 마을 공동체로 전환해야 한다고 외칠 때

전세계 기득권 세력의 완고한 프레임을 바꾸고

시민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감성적 담론을 마련할 때

그레타 툰베리 같은 청년들에게 부끄러워할 때

노년세대의 행동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모색할 때

지구 평균 기온 상승과 관련된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지구촌 모든 대통령궁 앞에서 치켜들 피켓을 고민할 때

양자역학과 저항운동을 연결시킬 수 없을까 궁리할 때

혼자는 혼자 있었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예술가 - 이문재


화가같이 생기셨어요
본관 뒤 작은 연못가 벤치
환자복 차림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연못에는 팔뚝만 한 비단잉어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화가요?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평상복 차림의 아주머니가 거들었다
멋지게 생기셨어요
쨍한 수면에 동그라미 몇개가 그려졌다
왁자한 매미 소리에 빈틈이 없었다

내가 화가처럼 보인다?
이발소에서 두어번
철학하는 사람 같습니다
교회 근처 커피숍에서 또 두어번
목회 활동 하시나 봐요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대학병원에서 산책 나온 두분께
덕담 한마디 남기고 돌아섰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지요
눈부시게 푸르른 늦여름

살고 있는 전셋집 경매 막느라
은행에서 융자 받고 나온 날 오후였다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 김포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동인지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금 여기가 맨 앞>, <혼자의 넓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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