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 안태현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 안태현 어두운 새 한 마리가 다시 돌아와 앉은 그 자리를 바라보는 일이 좋다 저녁 빛에 쌀을 씻어 안치고 오이냉국에 얼음 몇 조각을 띄워 휘휘 젓다 보면 생각 끝에 당신이 있다 가뭄에 논물을 끌어다 쓰듯 몇 번은 사정해서 옛일을 불러다 내 앞에 앉히곤 하는데 그저 지나가서 아쉽던 저녁처럼 몸이 뜨겁던 시절이 당신에게도 얼마쯤 있었으면 하는 게 내 속마음이다 시절과 시절 사이 내게 오는 아픔은 모든 것을 이해만 시키려 드는데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손들이 그 틈을 타서 솔기 터진 내 마음 어딘가를 툭 건드린다 돌확 같은 당신을 돌아와 고요히 고이는 수척한 밥 한술이란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생활의 목록 - 안태현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서 뜨거운 물..

한줄 詩 2021.10.05

빈 구두와 날짜들 - 이자규

빈 구두와 날짜들 - 이자규 시간을 분리하다 발판을 분리하다 그림자도 따라 갔다 움푹 들어간 날짜가 제거되고 신경선을 걷었다 비는 내리고 스쳤던 등받이에 닳아빠진 낱말들 흰 유니폼들이 인공 웃음으로 지나가고 비바람은 사선이다 금속성 데이트를 등으로 새겨야 했기에 바퀴를 뜯어내는 기억을 붉은 녹이 말했다 날것들이 눈꺼풀에 날아들었다 빈 구두와 빈 모자 그리고 미소가 필수인 종양실과 바흐가 흐르는 채혈실 붉은 장미가 각혈을 부풀렸다 방천 둑 쇠비름 따위나 되어 꽉꽉 밟히고 싶은 불면 한쪽을 난도질로 쥐어뜯는다면 단풍잎 울음은 어느 휠체어에 앉히나 하늘이 낮아졌다 '당신이 밀고 내가 앉고 싶어' 내 말에 '여기까지 내 그릇인가 봐' 우북이 쌓인 말들만 난무했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허 씨는 매..

한줄 詩 2021.10.05

잊힌 후 - 박남원

잊힌 후 - 박남원 비수처럼 비끼는 말들과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사람들의 생각이 한없이 차고 낯설 때 사랑조차 마음 같지 않아 안개 낀 들녘에 홀로 떠돌 때 비에 젖은 자작나무 숲길을 걸어 소리 없이 나는 그곳으로 떠나자. 언젠가 세월도 다 지나고 그 많던 상처도 꽃처럼 지고 사람들에게 잊힐 것 다 잊힌 후 어느 한적한 시골, 바람에 갈잎 흩어지는 외진 마을의 한 흙집, 그 안에 그동안 까맣게 잊혔던 나는 오래전에 그곳에 들어가 있자.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마당 앞을 지나는 한 여자의 눈동자에 이슬처럼 잠시 머물렀다가 길고 어두운 시간을 되돌아온 연어 같은, 그 오래된 기억의 기척에 문득 이끌려 지나던 발걸음 잠시 머뭇거리게 하는 이왕이면 지친 다리와 힘겨웠던 기억, 외로웠던 가슴도 조금 적셔주는 한..

한줄 詩 2021.10.04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 이은심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 이은심 끼니때마다 호명되는 냄비가 덜컹덜컹 우는 것은 맞지 않는 뚜껑 때문인데 간처럼 졸아붙는 삼중바닥이 되지 못한 까닭인데 이를 테면 한술 밥에 배부르다는 착각이 한술 밥에 배불리려는 억지가 시궁쥐에게 갉아 먹히는 것인데 잊을 만하면 입속의 차가운 말들을 불태우고 그때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밥 먹어둔다는 말은 얼마나 고픈 말이었나 숙식제공과 월수입 보장의 한복판에서 몇 개의 뺨을 적시느라 다 써버린 눈물이 배불러오는 공복을 허겁지겁 퍼먹던 그때 밥이 밥을 굶기던 그때 꺼질 듯 말 듯한 신화 그것이 연민을 불살라먹던 불씨라는 걸 탈 듯 말 듯한 연민 그것이 불씨를 익혀먹던 신화라는 걸 아름다운 불구경을 건너면 뿌리내린 공복에게 젖 물리는 안부조차 누군가에게 먹히는 밥이어서 쉽..

한줄 詩 2021.10.04

오후의 느낌과 여행을 떠나자 - 임곤택

오후의 느낌과 여행을 떠나자 - 임곤택 이렇게라도 바람이 불고 한 대씩 자동차 지나가고 늙은 여자는 애초부터 늙도록 되어 있어서 더 예쁜 것을 얻어서 딸을 얻은 사람은 그렇게 행복해져서 살아 있어서 참 좋은 오후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싼다 셋이 탄 자동차는 바퀴가 넷 등에는 배낭이 있고 이런 꿈을 꾼다 좋은 오후와는 어떻게든 늦게 만나서 채소를 함께 다듬고 반쯤 죽은 것에 물을 뿌려 반쯤 살리고 게으른 아이는 그냥 놔두면 된다 되도록 멀리 가기로 하였다 비가 예보되었다 가방에는 더 많은 자랑과 남는 식욕 뒤에 앉은 사람이 손가락 뻗어 저 앞을 가리킨다 둘인 듯 셋인 듯 그 이상인 듯 주머니엔 숟가락 하나씩 모처럼 하루가 빼곡히 채워지는 날 어쩌나, 그치기 싫다 *시집/ 죄 ..

한줄 詩 2021.10.03

밥숨 - 김윤환

밥숨 - 김윤환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건너뛰고 저녁에는 그냥 잤다는 그녀에게 먹고 사는 것이 죄가 될 리 있겠냐만 일 때문에 밥을 거르는 일이나 밥 때문에 숨을 거르는 일은 자기에게 죄를 짓는 일 이라고 말하고는 나도 식은 밥 한 숟가락을 뜬다 찬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무렵 묵은 한숨이 가슴에 얹혔고 마음속에는 긴 괘종소리가 울렸다 밥과 숨을 함께 쉬는 일없는 하오(下午)를 나도 그리워했다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발인(發靷) - 김윤환 이별은 잔치 후 정리되지 않는 주방 같은 것 쌓인 그릇과 남은 음식물에 묻은 소음 물린 채 풀리지 않는 나사들 울음이 벼루에 녹은 먹이 되어 폭과 너비를 알 수 없는 어둠을 그리는데 발은 바닥에 닿지 않고 손은 하늘에 닿지 않아 만질 수 없는 얼굴이 비가..

한줄 詩 2021.10.03

다인실 다인꿈 - 신용목

다인실 다인꿈 - 신용목 밤의 창가에서는 허공과 사람이 하나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너편을 바라보며 불을 끄거나 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 묻길래.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는데. 꼭 그는 슬픈 사람이라고 말한 것 같다. 침대의 잘못은 자신이 입구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데 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걱정을 만든다. 죄를 빼고 나면, 사랑은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착한 사람이다. 물속에 사는 사람처럼, 그네처럼, 시내버스 요금함에 거스름돈 떨어지는 소리처럼, 넘어졌던 아이가 일어나 탁탁 부딪치며 털고 있는 손바닥, 그리고 비행기. 무심한 밤하늘 한쪽 귀퉁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어야 한다. 검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는 그림자, 오로지 자신만을 가로지르며..

한줄 詩 2021.10.01

종착역 근처 - 최영철

종착역 근처 - 최영철 오래 전 한 깨달음 얻은 그 사람 망자 앞에 문상하며 덩실덩실 춤췄다 하나 나의 도는 그에 미치지 못해 돌아서서 빙그레 웃을 뿐이네 아 이제 그대는 살기 위해 고개 숙이고 헛웃음 날리고 죽기 위해 지랄발광 술상 뒤집지 않아도 될 터 그리워 목말라 울부짖고 아닌 척 근엄하게 먼 산 바라보지 않아도 될 터 탄생에 환호하고 여기를 떠나 새 행장 챙기기 바쁜 여행자 앞에 목 놓아 통곡하지 않아도 될 터 한평생 내 그림자로 동행하며 다음 여정 설계해 준 고마운 이 저승사자 손을 뿌리치지 않다도 될 터 지옥이라도 그보다 더한 천국이라도 아 이번이 이 어리석은 암행의 종착역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 굳이 그런 사족 달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으리 *시집/ 멸종 미..

한줄 詩 2021.10.01

이런 날이 왔다 - 이시백

이런 날이 왔다 - 이시백 사람이 존귀한 세상에 사람이 대접받기 어려운 세상이 왔다 친척 집에 가는 것도 민폐이고 결혼식에 상갓집에 가는 것도 민폐가 되는 세상 날마다 달마다 이리 사는데 제발 년년세세 그러지 않기를 우울이 넘치는 요즈음 새삼 개들이 위대해 보인다 2m의 목줄에 묶인 채 끊임없이 짖고 꼬리를 흔드는 행동이 대단하다 혹시 나는 어떤 목줄에 묶여 있나 따져 본다 몇 푼 안되는 월급에 묶이고 동호회에 묶이고 함량 미달인 건강에 묶이고 찾아보면 너무 많다 사실 중요하게 묶이는 게 더 있는데 양심이 걸린 문제라 차마 못 적겠다 *시집/ 널 위한 문장/ 작가교실 지천명 - 이시백 고백하건데 언제나 내가 품은 생각은 누런 황금을 거침없이 차지하는 거였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꼭 차지하리라는 믿는 구석이 ..

한줄 詩 2021.09.30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 김왕노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 김왕노 ​오래된 TV 드라마 한 장면에서 한밤중에 마당에서 줄넘기를 하자 뭐 하느냐고 물으니 고독에 몸부림친다 해서 웃은 적이 있다. 그때 웃을 일이 아니었고 지금 나도 고독해졌다. 친구와 휩쓸려 1차 2차 술자리를 하다가 3차 노래방에서 그 겨울의 아침을 부르고 장밋빛 스카프를 부르던 날이 꿈이었나 싶다. 스마트 폰의 많은 연락처 중에 선뜻 눌러야 할 이름이 없다. 이렇게 고독한 날은 화투 패를 뜨거나 전신에 문신을 새기고 싶다. ​몸을 화판으로 더 이상 고독하지 말라고 나와 함께 살아갈 문신을 새기는 것 깍두기처럼 가끔 어깨에 힘을 넣고 꿈틀거리는 문신을 과시하는 것 닭 피로 문신을 새기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순하게 느끼도록 사군자를 새기든지 풀꽃을 새겨..

한줄 詩 202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