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모호한 슬픔 - 박민혁

마루안 2021. 10. 16. 19:28

 

 

모호한 슬픔 - 박민혁

 

 

기다리는 전화가 있었나 봐요,
감추어 둔 희망을 들키는 기분

미래는 너무 많은 오늘을 약탈해 가고 있다

결국 너는 쥐가 난 슬픔
쥐가 난 왼손을 오른손으로 만졌을 때의 낯선 감촉 같은 거

이제 너는 공휴일에서 제외된 기념일 같다

한 여자애의 전화번호를 암기하는 일
너에게 없던 비립종 같은 걸 사랑하는 일
애인이 너의 이름을 발음할 때
멀미가 느껴지는 일

사랑은 왜 오전과 오후 사이에서만 기생하는지
이런 불가능한 시간이라니

운명이 뿌리고 간
겨우 한 자밤의 슬픔에 나는
이렇게도 엄살을 부리나

아직도 나, 내가 낳은 슬픔을 두고 훗배앓이 중

어쩔 건데,
이런 감정

모든 연애의 끝은
궁금한
궁금하지 않은
부모님의 굴욕 같은 거

나의 절망 역시 사행성이 짙습니다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촉망받는 우울

미안해
이제 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네 울음의 계이름 같은 거

이건 말하자면,
기묘한 표정의 슬픔 한 마리를 포획하는 일

 

 

*시집/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출판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 박민혁

 

 

종로3가역 구내에 모여 앉은 노인들이 비둘기 떼 같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오래 상상한 미래들이 큰 어긋남 없이 찾아온다. 불시(不時)만이 내 안식처. 역사를 나와 인사동까지 걸어가는 동안 갓 태어난 슬픔이 잠투정을 해 댄다. 산책, 고독한 자의 체육. 이 흉한 고독을 국소마취하는 방식.

 

이국의 악사가 몇몇의 연인들에 둘러싸여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그에게 내어 줄 만한 것이 수중에 없으므로, 모르는 척 지나가기로. 비쩍 마른 음계가 구걸하는 빈국의 아이들처럼 몇 발자국 따라오다가 이내 멈춰 선다. 그래, 그게 예의라는 거지. 얼핏 나는 예의 바른 사람 같다.

 

내 표정을 측량하며 시간을 빌리려는 낯선 이. 그에게 대꾸조차 않는 건 그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오래된 불행을 새삼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다.

 

조계사의 문 열린 법당 밖으로 절하는 여자의 엉덩이 골이 보인다. 불상 앞에서 되돌아 절을 한다면 그것은 성인에 대한 모욕일까, 예우일까. 뒤돌아선 사람의 낯은 알 수가 없지.

 

죽고 싶은 동시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와 나, 둘 중 더 외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제법 살집이 오른 불상을 보며 종교의 보호색 같은 것을 생각한다. 교회를 처음 나갔을 때 받은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붓다여, 오늘 이 청승은 당신만 알고 있기예요. 그렇다고 개종했다는 건 아니고. 당신과 연애하자는 건 더더욱 아니고.

 

식당 여자가 잘못 내온 음식 앞에서 습관적으로 식전 기도를 할 뻔했다. 홀로 식사하는 사람들 모두 이어폰을 끼고, 저마다의 오늘을 감추고 있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자신이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어린아이처럼.

 

거리에 벤치들이 간헐적으로 놓인다. 피로하므로 오늘은 와불이 되고 싶다는 망상. 이 국지성 불안이 시가 되는 선에서.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침대는 왜 공공시설이 될 수 없는가.

 

 

*이웃에 방해가 되진 않는 선에서: 브로콜리너마저.

 

 

 

 

# 박민혁 시인은 1983년 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동국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7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이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과 전봇대와 나 - 정철훈  (0) 2021.10.17
혼자가 연락했다 - 이문재  (0) 2021.10.16
나는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 김한규  (0) 2021.10.15
가로등 끄는 사람 - 이현승  (0) 2021.10.15
술과 잠 - 진창윤  (0) 202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