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훌륭한 불행 - 박지웅

마루안 2022. 1. 12. 22:45

 

 

훌륭한 불행 - 박지웅


당신이 보내준 절벽 잘 받았어요
어떤 편지는 아찔하거든요 특히 마지막 줄은 기막히게 좋았어요 그 끝에 부들거리며 서 있다 밑으로 고꾸라지는 꿈을 꾸게 되었거든요

그곳에서 누군가 바위로 눌러놓은 봄을 보았어요

동고비 한 마리 깃 비비고 간 그늘에서 천둥소리가 태어나고 그 찢어진 틈으로 빗줄기들을 수레에 싣고 서쪽으로 다 옮기면 장마가 끝나겠지요

청춘은 성냥개비 같은 어깨를 가졌지요

스치는 대로 불이 붙는 곳이었지요 손짓 한번 조심스럽던 날들 이토록 감싸는 건 내게 당신이라는 훌륭한 불행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서쪽을 다 지나온 절벽들이 멈추어 선 곳
찢어 날린 편지가 저녁이 되건 눈보라가 되건 나는 몰라요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가끔 타지 않은 편지가 - 박지웅


산 자들이 쓰다 버린 문자는 무당이 주워 쓰거나 귀신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숨결을 타지 않은 말의 육체가 사라지듯 지하에 묻힌 말도 불러낼 수 있다 그것을 아는 자는 글씨를 함부로 땅에 쓰지 않았다 망자로 이야기꽃 피운 자리는 불을 질러 귀문(鬼門)을 닫았다

불탄 자리를 뒤적이면
가끔 다 타지 않은 편지가 나왔다

아이들은 글씨를 주머니 깊이 넣어두었다가 먼저 잠든 사람의 머리맡에 몰래 뿌리곤 했다 미처 하지 못한 말 닿지 않은 글이 귓속으로 들어가면 꿈자리가 사나웠다 귀신과 공모한 아이들은 쾌활했으나 비극이란 애초에 모두 즐거움이었다

어떤 불행은 등잔불도 켜두지 않았으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까마귀처럼 웅크리고 꿈을 꾸었다 흰 나무의 미간에 푸득거리며 떨어지는 꿈, 저승은 봄이었다 귀신들이 꽃잎으로 나무의 말을 헤아리는 밤이었다

쓸쓸함을 열고 까악까악 우는 백목(白木)의 숲
그곳에는 꽃으로 가려놓은 함정이 있다

꿈에 덮인 꿈을 잘못 밟았다가 더 깊은 명부로 떨어지며 지층 사이에 버려진 집터가 나온다 다만 흐린 초성(初聲)으로 남은 길과 벽과 사방, 재가 된 방 안에 들어서면 시커멓게 바스러지는 발바닥

어떤 꿈은 몇 번이나 관(棺)을 지나서야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

그는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던 방언을 중얼거린다 무명(無名)에 입술을 댔다가 지하의 글자들이 입속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목젖으로 올라오는 누군가의 혀들, 귀문에서 되살아나 흩어지는 홀씨들

 

 

 

 

# 박지웅 시인은 1969년 부산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시와사상> 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나비가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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