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함몰 - 윤의섭

마루안 2022. 1. 8. 21:27

 

 

함몰 - 윤의섭

 

 

달력에 쓰인 일정대로라면 여행을 다녀왔어야 하는데

나는 떠나본 적 없다

다녀왔어도 잊어버린 것인지

 

눈에 찍힌 발자국이 다시 눈에 쌓여 지워지고

꽃잎 떨궈낸 자리에 새로 꽃잎이 피어나고

봉분 갓 올린 무덤을 풀잎이 뒤덮고

 

퇴적의 역사는 쉽게 발굴되지 않는다

 

옷을 껴입지 그래요 추운데

정말 거기 갔을지도 몰라요

모자를 쓰든지 우산을 써 봐요 이런 날 외출하는데

그럼 나는 얼마나 오래 삭제되어 있었던 건가요

 

사람들이 여행이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장례라고 말한다

대기권에선 늘 풍장 중인

 

달력에는 동그라미 표시한 날짜가 있다

여행이 끝나는 날이거나

떠날 날이거나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절리 - 윤의섭

 

 

이 상태로는 오래 가지 못한다

 

내리는 눈과 눈 사이와

수직의 나무와 수직의 사람과 틈은 벌어질 뿐이라는 이치는

봉합되지 않는 환부에 가깝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함께라는 말은 따로였다라는 원상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처음부터 연약한 성질은 아니었으나 기후 환경과 지질학적 특성 및 중력의 영향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여 기둥 모양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는데

 

긴 해명에 지쳐가고

좁혀지지 않는 보폭이나 지평과 설운의 거리 혹은 이생과 내생의 거리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견딘다는 건 불가능한 별이 되어야 한다는 것

 

내리는 눈과 눈 사이로 풍경이 갈라지고

절벽이 생기고

우린 서로 서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화 - 김진규  (0) 2022.01.11
사람의 일이란 - 안태현  (0) 2022.01.09
발 시림과 치 떨림 - 최준  (0) 2022.01.07
가짜도 모르는 가짜뉴스 - 정덕재  (0) 2022.01.07
배심원 - 안은숙  (0) 202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