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그런 사람을 누구라고 부르는가 - 이정희

그런 사람을 누구라고 부르는가 - 이정희 매운 연기의 아궁이로 몇 년 살다가 부글부글 끓는 밥솥으로 몇 년 살다가 다시, 솥뚜껑 들썩이는 화로 몇 년을 살았다 조리로 쌀알 일어 안치면 밥물이 자작자작 밥이 누룽지듯 속이 타고 입술이 타는 그런 시간들이 지났다 한 칸 한 칸 정량의 물이 소진되듯 무수한 반복으로 뜸을 들였다 그렇게 찔끔찔끔 물의 공간에서 불의 일렁거림을 거쳐 누룽지는 잔불의 시간 찬장 밑 막걸리가 식초로 발효되는 동안 두껍게 얇게 한 생애가 눌어붙는다 빈 아궁이로 식어가다 시커멓게 그을린 천정처럼 막막해지고 시래기처럼 햇살의 기울기에 뒤채는 그런 사람 어둡고 칙칙한 그 살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을음으로 남은 사람 매운 연기도 없이 밥을 짓고 그을린 천정도 없는 눅지 않는 밥솥의 바닥 같은 그..

한줄 詩 2022.01.29

어느 친구의 죽음 - 박인식

어느 친구의 죽음 - 박인식 오래 못 본 친구에게 전화 넣었다 아내가 대신 받아 애 아빠가 지금 막 숨을 거둬,,,, 그녀 통곡에 깨어난 꿈 나는 곧 그 친구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실을 기억해내 친구 아내에게 전화 걸었다 이번에는 아내가 아니라 죽은 친구가 전화 받더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죽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거기가 어디야 그때가 언젠데 이제야 전화하는 거야 친구의 놀란 목소리에 다시 깨어나도 여기가 어디인지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꿈 속의 꿈 *시집/ 내 죽음, 그 뒤/ 여름언덕 뒤돌아보니 - 박인식 꼬마야 누가 불러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고 쇼윈도 유리창에 웬 백발 노인네만 비쳤던 고개 한 번 돌렸는데 일생이 다 흘러가버린 거기 여기는 할아버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면 꼬마의..

한줄 詩 2022.01.28

비탈 - 김수우

비탈 - 김수우 미끄럽다 찢어진다 평지에 서보지 못한 발목들이 엎어진다 내가 버린 쓰레기들이 수평선을 넘어간다 동서남북에 산불이다 몇달씩 타오른다 미얀마 청년들은 암흑과 싸우는 중이다 피가 터진다 거북이 배 속에 구겨진 패트병이 가득하다 빙하가 허물어진다 폭우와 폭염과 돌풍과 가뭄, 저 순서가 없는 불화들 고압선마다 걸린 무수한 갈고랑이들 창문을 깨뜨리던 무수한 돋보기 현미경들 우리 안의 가파른 사선은 읽지 못했다 짐승의 내장을 닮은 천민 자본은 비탈을 오르려 발악이다 평민 희망은 비탈을 잡고 바동거린다 원래 비탈이었던 가난은 잘 미끄러진다 물길을 낸다 흔쾌하다 하루가 된다 허공에 놓인 저 사다리 한참 더 내려가야 한다 궤도가 멈추는데 어떤 수태를 기억하는가 야생 쑥 무더기로 쏟아지는 봄, 봄이 미끄러진..

한줄 詩 2022.01.28

주름에 경배한다 - 김일태

주름에 경배한다 - 김일태 주름졌다는 것은 기운 빠졌다는 게 아니다 나를 접었다는 것이다 나를 내어주면서 너를 편안히 받아들일 힘이 쌓였다는 것이다 오냐오냐 한마디로 투정 철부지 짓 다 받아주시던 어머니의 포근함은 주름의 힘이었다 뒷산 소나무가 바람을 견뎌낸 것 다 주름의 힘이었다 주름을 만든다는 것은 나를 버려 너를 버는 일이다 하늘과 다투지 않는 요령으로 농투성이들이 논밭에 이랑과 고랑을 짓듯이 주름에 경배하라 *시집/ 주름의 힘/ 시선사 동지(冬至) 건너 동지(同志) - 김일태 동지쯤이었던가 밝음은 짧고 어둠은 까마득하던 그때 동지로 다가와서 내 안의 석등의 되어 삼동의 절망과 희망을 까무락 까무락 하, 서른일곱 번이나 달고 짜게 건너와서 다시 한번 맞이하는 삼동의 들머리 이제는 떨 일도 없는데 큰..

한줄 詩 2022.01.27

그리하여 아주 사소하게 나는 - 박남원

그리하여 아주 사소하게 나는 - 박남원 내 인생은 그랬다. 대개는 남 위해 차려진 밥상머리에나 두리번거리다가 파장이 되면 군중처럼 지나간 유흥의 뒤끝으로 걸어 나와 쓸쓸히 혼자 저문 골목길 걸어 돌아오곤 했다. 욕망이 가리킨 자리, 숲은 언제나 무성하였으나 대개는 볕 드는 쪽으로 세상 나무들은 향하고 있었고 바람조차 흐르기 좋은 제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인간의 높낮이보다 옳고 그름이 내게는 항상 그리웠으나 그럴 때마다 저무는 저녁노을을 홀로 바라보거나 가끔은 조금 남아있는 희망의 시선으로 누군가를 애써 바라보곤 했다. 대개는 그냥 그렇게 살아온 것뿐이다.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의 애틋한 호명 한 번 받은 적 없고 만인 중의 사소한 어느 하나가 되어 삶의 고갯마루 힘겹게 넘어왔을 뿐이다. 언제였던가. ..

한줄 詩 2022.01.27

오뎅을 존중하라 - 정덕재

오뎅을 존중하라 - 정덕재 -시장 안에서 선거운동 금지 선거운동 기간에 오뎅 꼬치를 들고 사진을 찍지 마라 오뎅은 촬영용 소품이 아니다 뜨거운 국물 통에서 온몸이 불어터지도록 적셔진 오뎅은 학교 앞 조잘대는 아이들 간식 가득 따른 소주를 털어 넣고 한입 베어 무는 조촐한 안주 왁자지껄 점심도시락 빠지지 않던 단골반찬이다 생활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오뎅을 어느 한 순간 사진 속 값싼 모델로 등장시켜 수모를 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오뎅 들고 사진을 찍지 말아라 오뎅은 당신의 소품이 아니라 허기를 달래준 따뜻한 위안이었다 사거리 모퉁이 학교 앞 문구점 골목 전봇대에 기댄 리어커 세상 어디에도 수모를 받아야 할 오뎅은 없다 *시집/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스토리밥 검새의 날개 - 정덕재..

한줄 詩 2022.01.26

얼음잠을 자고 - 이현승

얼음잠을 자고 - 이현승 백 년 뒤에 깨어나기 위해 얼음잠을 자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버거웠던 건 늘 미래가 아니다. 지금 고칠 수 없는 병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언제나 당대가 문제이고 당대는 문제인 한에서만 당대인 것이다. 질문은 여전하다. 새로운 몸을 받아도 백 년 전의 영혼으로 백 년의 고독과 그보다 더 무거운 상실을 견디면서 물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은 여전할 것이다. 두리번거리는 나의 버릇을 아무리 밀어내도 고여오는 불안과 우울을 어떤 것도 다 가능해지는 환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땅과 죽음이 지금의 증언자이다. ADHD와 조현병과 사이코패스가 시대정신인 것처럼. 나는 누구일까? 대답은 욕망에게 들어야 하고, 유감스럽게도 내가 누구인지는 포털과 유튜브..

한줄 詩 2022.01.25

새 한 마리 날아와 - 김정미

새 한 마리 날아와 - 김정미 지독하게 먼 허공과 콘크리트 바닥을 오르내리는 새를 본다 단 하나의 표정으로 그들만의 세상을 사는 새들은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도 추락을 상상하지 않는다 나도 어쩌면 무심히 창밖에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어떤 시절을 떠올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는 친구가 오래된 의자를 잃었다 상실이 익숙해지는 동안 추락은 계속될 것이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텅 빈 버스를 그냥 보내는 일이 자연스러워질 때쯤 친구는 새 의자를 다시 구할 수 있을까 새들의 발자국을 발견할 때마다 추락과 비상을 떠올렸다 죽는 것도 결국 사는 일이라는 새들의 말을 한 줌씩 모으는 늦은 저녁이 젖는다 *시집/ 그 슬픔을 어떻게 모른 체해/ 상상인 마지막 페이지에 - 김정미 나는 엎질러졌다 겨울이 자작나무를 끌어안고..

한줄 詩 2022.01.25

거꾸로 읽는 편지 - 최규환

거꾸로 읽는 편지 - 최규환 소양호 계곡으로 가는 길 기억의 매듭이 간격을 잃고 말았다 울음보따리 풀어놓듯 넘실대는 산자락들 봄볕이 좋아 망설이던 사이 묵언수행 중이던 먹보 행자의 겨울은 차고 외로웠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던 서울살이였는데 초록이 짙고 다시 겨울이 찾아오던 해 그는 새벽에 핀 고드름처럼 투명한 결을 따라 처소를 옮겼다 지워진 숲의 얼굴도 있었다 불 그림 그리는 친구는 청평사 사천왕 옆에서 사문(寺門) 대들보를 물려받은 후 삼십 년 넘어서니 아들 하나 생겼다 했고 계곡의 얼음결을 따라 숨 죽여 읽고 또 읽었던 설경(雪景) 속 편지 나는 그해 겨울을 견디지 못해 호젓한 연못에 편지를 띄웠다 산사로 가는 첫배 거꾸로 가는 방법을 몰라 젖은 매듭으로 나풀거렸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한줄 詩 2022.01.22

숟가락으로 두루치기를 먹다 - 김주태

숟가락으로 두루치기를 먹다 - 김주태 몸으로 살던 때가 있었다 벽돌을 지고 계단을 오르면 아침부터 단내가 났다 그런 날이면 목에 때 벗긴다고 단골집에 둘러앉았다 노릿하게 익은 돼지 살점에 허기가 밀려와 급하게 젓가락 들면 손가락이 굳어 젓가락질이 되지 않았다 왼손으로 오른 손가락 마디를 주무르고 오른손으로 왼손 손가락을 풀어도 굳어진 손가락은 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숟가락으로 두루치기를 퍼먹었는데 양파를 많이 넣었는지 알싸하게 눈이 매웠다 조적공과 철근이 내 눈을 훔쳐보고 눈물 바람이나 하는 줄 알았는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이 판을 뜨라고 했다 골병이 몸에 박히면 빼내지 못한다고 하루빨리 접는 게 살길이라고 어서 이 판을 뜨라고 했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순대 골목 - 김주태 스무 살 ..

한줄 詩 2022.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