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톱니바퀴에 끼어 - 김추인

톱니바퀴에 끼어 - 김추인 생체 시계는 누구의 의도된 프로젝트인가 크기나 두께의 정렬도 아니고 자동만도 수동만도 아닌데 내 몸의 시계를 조종하는 너, 누구냐 정밀하다 톱니바퀴들 맞물려 돌아가고 오차 없이 프로그램되어 시행되는 생체의 길 살의 톱니바퀴 뼈의 톱니바퀴 숨의 바퀴 피의 바퀴 내장은 내장대로 거죽은 거죽인 채로 내용물이 제 형태를 지키도록 살뜰히도 감싸 안은 가죽 자루의 책무 요즘 배설의 톱니바퀴 엇박자로 건너뛰어도 기동력 떨어져 좀 낡았거니 치부했을 뿐 이, 목, 구, 비 쓸 만하다 눙치고 버텼는데 일 났다 전두엽 쪽에서 보내오는 경고 메시지 깜박깜박 까물까물 긴가민가 우주의 톱니바퀴 무심히 돌고 있을 이 시간 나는 탕헤르의 바닷가에서 암고양이 그리자벨라의 '메모리'를 노래하고 있다 *시집/ ..

한줄 詩 2022.02.09

인연이라는 것은 이처럼 유치한데 - 송병호

인연이라는 것은 이처럼 유치한데 - 송병호 눈썹에 쓸린 빗물을 손등에 훑는다 쉬 걷힐 것 같지 않다 물먹은 솜뭉치를 업은 소나기구름 시퍼런 칼날에 베인 폭포 창문 너머 얼비친 파전 굽는 뒤태, 비밀을 감춘 실루엣 어느 삼류 화가가 은소반에 흘린 보름달 같다 몇 순배의 잔과 짧은 혀끝 말 파전은 봉분 같고 달덩이 같고 고해하듯 성체의 단말기는 출구를 도모한다 꽃바람은 언제라도 넉넉하지 않다 얍삽한 조갯살 미궁으로 빨려 드는 가장 정직한 동질 급체에 바늘 찔린 외피의 화농 툭 떨어지는 저 붉운 꽃잎 (둘 사이) 이면의 계약서 같은 형식은 필요치 않았다 *시집/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다/ 상상인 인연은 그냥 인연이었으면 좋겠다 - 송병호 인연이라는 것이 겉과 곁이 포개졌다 나뉜 하트의 반쪽처럼 상관의 결이 다르..

한줄 詩 2022.02.08

그 눈망울의 배후 - 복효근

그 눈망울의 배후 - 복효근 가난한 이웃나라 어느 빈촌에 갔을 때 진열대에 싸구려 과자만 잔뜩 쌓여있는 허름한 가게 하나 있었다 헐벗은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이 애처러워 몇 푼씩 주려 하자 안내를 맡은 이가 돈을 주는 대신 가게에서 과자를 사서 한 봉지씩 쥐어주라고 했다 과자 한 봉지씩 쥐어주고 쓰러져가는 집들을 돌아보고 골목을 벗어나려는데 아이들 손에 들렸던 과자는 다시 거두어져 진열대에 놓이는 것을 보았다 내가 준 것이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내가 지은 것이 복이었을까 죄였을까 어느 하늘보다 별이 맑은 그 밤 끝내 묻지 못하였다 아이들의 머루알 같은 그 눈망울의 배후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사 입춘 무렵 - 복효근 혼자 살다가, 버티다가 딸내미, 사위들 몰려와서 가재도구 차에 나누어 싣고..

한줄 詩 2022.02.05

흔적 - 정덕재

흔적 - 정덕재 생애가 끝나기 전에 모든 것을 비운다 나이 쉰다섯을 넘은 뒤부터 남아 있는 것을 하나씩 지우기로 결심했다 천 권이 넘는 책을 버렸다 기억에 남는 책은 백 권이 되지 않았고 표지를 펼치지 않은 책은 삼백 권이 넘었다 열 켤레 신발 중에서 두 켤레만 남긴 결정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양복 열 벌을 버리고 두 벌만 남겼다 하나는 결혼식장 또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많은 것을 지웠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삿날 짜장면 먹는 관습처럼 탕수육 한 그릇 앞에 놓고 잔을 기울었다 미련을 비우는 게 인생의 명예라고 술 취한 고개를 끄덕이며 불명예스러운 일회용 플라스틱 유산을 남기고 말았다 내 생애가 끝나도 흔적은 대대손손 중국집 플라스틱으로 남는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오래된 운동화 - 정덕재..

한줄 詩 2022.02.05

태엽 감는 아버지 - 안은숙

태엽 감는 아버지 - 안은숙 어느 나라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그리워한 적은 있다 그럴 때 나는 태엽 감는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태엽을 감다 보면 자꾸 무더운 여름이 왔고 아버지는 노을처럼 녹슬어갔다 엄마의 방은 온통 한쪽으로만 감겨 있었고 늘 열려 있어 좋았다 저녁이면 내 입에선 혓바늘이 돋아 하수구 있는 좁은 마당에 빙글빙글 비행기가 한 방향으로 잘도 돌았다 그 어지러운 기류를 타고 나팔꽃이 피어났다 장난감은 고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싫증이 나는 거라 생각했다 눈이 따가울 때 어느 먼 나라는 가까이 감겨 있었고, 옆집 담 끝에 걸려 있던 파란 감이 서둘러 붉어지면 아버지가 돌아왔다 고봉밥이 올라오고 며칠 동안 대문은 잠기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장난감은 바뀌었지만 아버지, 나는 말하는 장난이 필요해요 주..

한줄 詩 2022.02.04

중심 - 김기리

중심 - 김기리 내게 있던 중심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자꾸 비틀거리던 것들만 내 몸에 깃들고 싶어 할까 그 수많던 얼음 신발은 유독 내 발에만 신겨 있는 걸까 바람 부는 날의 한 그루 나무라 여기자 신나게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중이었다고 여기자 아직 고요가 깃들지 않은 몸이라 이렇게 고마운 휘청거리는 중심 그냥, 그냥 휘청대는 중심에 서서 달력 한 장 또 넘어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내가 부축했던 사람들이 흔들리는 나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다 *시집/ 기다리는 시간은 아직 어리고/ 문학들 저울 - 김기리 저울에는 바르르 떠는 중심이 있다는 거지 반듯이 이쪽과 저쪽이 있어야만 제 몫을 다 한다는 거지 이생에는 업으로 부르는 이름과 침묵해야 할 이름들이 중심에 모여들어 바르르 떨고 있을 거라는 거지 어제는 ..

한줄 詩 2022.02.04

떠나던 날들의 풍경 - 이성배

떠나던 날들의 풍경 - 이성배 마을에는 오백 년도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몸통 여러 곳이 복사뼈처럼 울룩불룩하고 마을 뒷산도 가뿐하게 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뒷산에는 또 너럭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개망초 다발이나 잔대 싹, 쑥개떡이 차려진 소꿉 밥상이 서서히 별 보자기에 덮이던 풍경은 온종일 서럽던 아이들이 차린 것이었다. 너럭바위에서 노는 게 심심했던 형과 누나들은 어른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몰래 느티나무의 복사뼈를 맨발로 디디고 올라가 제일 높은 곳을 손으로 짚고 내려왔다. 얼마 뒤 그런 형과 누나들은 군불을 지피는 어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도시로 떠났다. 뙤약볕 비탈밭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재구네 모친 넷째가 다녀갔는지 복사뼈 닮은 봉분 앞에 개망초꽃 한 다발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

한줄 詩 2022.02.03

어떤 평화주의 - 박소원

어떤 평화주의 - 박소원 남도창도 잘하고 학춤도 잘 추는 아버지는 사시사철 감수성이 풍부한 사내다 날씨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중복 더위에 어머니의 턱을 어그러뜨려 놓고 보양식을 사먹으러 읍내로 나갔다 어머니는 얼굴을 가리고 손을 내젓고 나는 집을 뛰쳐나갔다 마을길을 피해 공동묘지 무덤들 사이에 웅크린 채, 별이 뜨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부르러 오기를 기다리던 나날 겁 없이 잠들어 버리던 나날 무덤에 기대어 잠이 든 나는, 더 이상의 비극을 예상하지 않았다 *시집/ 즐거운 장례/ 곰곰나루 11월 - 박소원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캄캄한 터널을 지나며 손등에 점이 된다 어머니 귓바퀴에는 두 개의 점이 굽은 등에는 일곱 개의 점이 박혀 있다 일 년에 딱 한 번 아버지가 다녀가는 계절 아버지는 운..

한줄 詩 2022.02.03

개에게도 있고 사람에게도 있지만 사람들이 더 민감한 - 박찬호

개에게도 있고 사람에게도 있지만 사람들이 더 민감한 - 박찬호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네가 나를 감싸주는지 어차피 대화로 얘기하지 않아도 아는 것 육감으로 아는 것 개는 나에게 묻지 않지만 내 눈을 보고 아는 것 너는 나에게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는 그것 그만큼 예민하고 중대한 것 끝없이 눈에 보이고 마음에 차야 하는 것 개에게는 믿음으로 보이고 사람에게는 현물로 대신해 보이는 것 개에게는 모든 빗장을 풀지만 네게는 꼭 마지막 하나씩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 개나 사람이나 다들 느끼는 것 육감으로 알지만 너는 칠감(七感)으로 보이길 요구하는 것 그 사랑 무한할 거 같은 유한의 작은 사랑 *시집/ 꼭 온다고 했던 그날/ 천년의시작 확증편향 - 박찬호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삶의 신념 혹은 지울 수 없..

한줄 詩 2022.02.03

소리의 거스러미 - 안태현

소리의 거스러미 - 안태현 너그러운 순환 노루귀 같은 말들과 우애하며 살자 그랬습니다만 눈을 뜨면 매일 첫 사냥을 나가는 것처럼 맨발의 감촉이 살아납니다 저녁엔 동굴로 돌아와서 불을 켜고 동사들의 야행성을 잠재웁니다 소금쟁이들이 집단 서식하고 있는 두 개의 고원 사이 살얼음 한 장 도무지 녹을 기미가 없는 아래층 남자가 팔팔 끓고 불콰해진 죽창이 어젯밤부터 내 쳐진 엉덩이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여기, 내가 살고 있다는 말보다 그가 살고 있다는 말이 더 실감이 납니다 쏟아져 눈부시게 흩어지는 바둑알 또는 큰 대야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또는 희고 검은 건반처럼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높은 파고가 되는 소리의 거스러미 아래는 아래를 쌓고 위는 위를 쌓아서 비무장지대 같은 공중정원이 완성된다고 누가 말했을까요 창..

한줄 詩 2022.01.30